날이 더워지니 밥맛이 슬슬 떨어진다.
계절 상관없이 따끈한 국과 찌개를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빈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럴 때는 뭐다?
글치, 열무물김치!
정답을 알고 있지만, 나 먹자고 음식을 하기란 참 성가셔서 예년보다 그 시작이 늦었다.
시작을 하면 여름 내내 지속되어야 하니, 지속 가능한 일을 시작할 때는 결심이 필요한 법이다.
싱싱한 열무 한 단을 샀다.
다듬어 절여놓은 다음, 물김치 분량만큼 잡은 물에 밥 한 공기 넣어 폭폭 끓인다.
열무물김치는 엄마가 하던 방식대로 고춧가루 없이 뽀얗게 하는데, 밀가루나 찹쌀가루 아닌 밥을 넣어 끓여 식힌 밥물이다.
열무 외는 다 집에 있는 부재료도 손질했다.
색을 더해 줄 당근과 양파 채 썰고, 매콤한 땡초 네댓 개 분질러 두고, 마늘 몇 쪽 편 썰고, 드디어 김치통에 담을 일만 남았다.
절여진 열무와 기타 부재료들을 한 켜씩 번갈아 담고, 식은 밥물을 체에 걸러 좌악 부었다.
멸치 다시마 육수 한 통도 꺼내 섞고 배주스도 적당히 넣었다.
물 양이 잘 맞았다.
다 넣었네, 빠진 게 있나?
아, 매실청도 좀 넣어야 감칠맛 있게 발효되겠지.
냉장고에서 매실청 병을 꺼내 주룩 부었다.
근데 물에 동동 뜨는 이건 웬 방울방울?
악, 이것은 챔기름...!!
망.했.다!
모든 재료 다 넣고 마지막 하룡점정도 아니고, 그것은 매실청 아닌 참기름이었다.
똑같은 소스병 2개에 각각 매실청과 참기름이 들었다.
매실청엔 네임택을 붙였고 참기름병엔 없다.
없어도 될 만큼 침전물이며 밀도와 색이 참기름임이 너무 확실하니까.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 머리가 하얗게(머리카락은 이미 하얗다만) 정지상태로 잠깐 있었다.
와중에 다행이라면, 기름방울이 뜨는 순간 재빨리 멈추어서이고, 물 위로 떠오르니 분리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물 붓기 전 열무와 바로 버무렸다면 참기름의 그 강력한 꼬순내를 우뚜케 없앨 거냐고.
나는 요리를 잘하지 못하고 겨우 아들 밥 해먹일 정도였는데, 엉성한 솜씨일지라도 양념을 헷갈리진 않았다.
이를테면, 설탕 대신 소금을 넣는다든지 하는 해프닝 말이다.
그런데 지난번 덜그덕 신발도 그렇고, 참기름 넣은 물김치라는 비위 상할 메뉴를 개발하지 않나, 안 하던 허당 짓에 쓴웃음이 난다.
동동 뜬 참기름을 작은 국자로 일일이 떠내며 문득 든 생각, 주여 때가 되었습니까? (릴케, 쏴리~)
늙는 것을 이런 식으로 증명할 때가 되었다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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