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406 니가 내 되어 봐야 1. 학생으로. 내 생애 단 한 번 선생님으로부터 맞아본 경험은 지금도 너무 생생하다. 단 한 번이라는 부분에서 이미 많은 분들의 심기에 가시가 돋았음을 알겠지만, 그렇다. 난 이른바 범생이었다. 아버지께서 교직에 계셔서, 껌 좀 씹고 싶은 굴뚝 같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ooo선생 딸내미"라는 꼬리표를 학창시절 내내 달고 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정말 강요된 모범생 역할에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어버지 얼굴에 누가 되는 짓은 절대로 해서 안 된다는 효심이라기보다 껄렁하게 구는 친구들도 마냥 어리게 보였던 나의 성향 때문이라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중학교 들어가서 열린 교내 백일장에서 산문부문에 차상인가를 받았다. 1학년 꼬맹이였다.주어진 散文題는 였던 걸로 기억한다. 한 뚱뚱한 .. 2006. 5. 16. 정말 모르겠다. 도무지 나는 나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혹 나는 미친 것이 아닐까. 밥을 하려고 쌀통을 보니 달랑 한 컵 정도가 있다. 어제 쌀 배달을 잊은 채 퇴근 후 밤시간을 내내 빈둥거리며 지내 버렸다. 그건 좋다. 흔히 있는 일이다. 쌀집의 스티커를 찾았다. 배달을 위해 바구니에 모아 둔 스티커를 찾는다. 하.. 2006. 5. 11. 새끼와 쉑기 얼마 전 오랜만에 한 드라마를 보았다. 퇴근 후 적막한 집안에 사람 소리를 내어볼 요량으로 습관적으로 T.V.를 켜지만, T.v.를 보기보다 지친 몸을 픽 던져 잠시 기절한 후 일어나 정신을 수습하는 게 보통이다. 드라마에서는 삼류 깡패와 그를 사랑하는 여자와 이혼한 여자와 말을 잃어버.. 2006. 5. 6. 시 두 편 <봄> ㅡ서정주 복사꽃 피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 뜨고, 초록제비 무처오는 하늬바람 우에 혼령있는 하눌이어. 피가 잘 도라....아무 病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아득하면 되리라> ㅡ박 재 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 2006. 5. 3. 너무 환한 세상 내 시력은 썩 나쁘진 않다. 근시 약간, 난시는 조금 심하다. 밤 네온사인이나 비 오는 날 아니면 못 견딜만큼 나쁜 눈은 아니다. 그래서 안경을 잘 안 쓴 지 제법 되었다. 벗고 다녀보니 참 편했다.몽 환적인 세상이었다.몇 미터 앞의 사람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또렷이 보고 싶으면 다가가면 되고 먼 곳은 포기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TV나 영화를 볼 때는 안 쓸 수 없다. 배우 얼굴이야 궁금하지도 않지만 두 겹 세 겹 보이는 글자를 읽을 수 없다. 홈쇼핑 볼 때도 꼭 안경이 필요하다. 문득, 시력 검사한 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경을 바꾸지 않고 계속 몇 년 동안 썼기에 어제 새로 돗수를 조절했다. 오늘 아침. 비 온 뒤라서 그런가, 새 안경을 끼고 보는 세상, 언제부터 이리 맑았나! 언.. 2006. 4. 28. 사소하지만 멈추게 하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예쁜 이야기, 미운 이야기 중 어떤 걸 먼저 원하세요? 외국 영화에 잘 나오는, 두 가지 뉴스가 있어, 좋은 소식 나쁜 소식 어떤 걸 먼저 원해? 하며 묻는 대목을 흉내내 본 거예요.다들 건망증에 치매까지 의심해 본 경험들이 있으실 것 같아 제가 잔머리를 돌려 순서를 정해요. 그래, 먼저 까먹어도 아깝지 않을 것부터 해야지. 하나. 며칠 전 집을 나서 막 골목길을 빠져 한길로 나오려던 참이었어요. 골목 끝에는 24시 편의점이 하나 있어요. 어떤 처녀와 총각이 그 편의점에서 나와 내 앞을 걸어가요. 처녀는 편의점에서 딸기우유를 사서 연방 마시면서 나왔어요.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것 말이예요. 아, 그러더니 다 먹은 우유통을 그만 땅에다 휙 던져버리지 뭐예요. 일말의 망설임도.. 2006. 4. 15. 울언니 주말에 친정에 갔었다. 간 걸음에 가까이 사는 언니에게 안부전화를 해 보니, 목소리가 아픈 듯하였다. "어디가 아프나?" "응, 허리를 좀 삐끗했는데 꼼짝을 못하고 누웠다야." "병원에 갔었나?" "아니, 오늘 일요일이라 내일 한의원에 침 맞으러 갈라 한다. 내 허리병 고질병 아이가. 아부지한테는 말하지 마라. 괜히 걱정만 하신다" 삼남매 중에서 첫째이자 나의 유일한 자매인 언니다. 형부를 교통사고로 잃고 혼자 살아온 지 20여 년이다. 형부는 언니와 결혼하여 10년을 살다 떠났고 그 배의 세월을 언니는 혼자 지낸다. 죽은 남편을 못 잊어서가 아니다. 처음에는 어린 남매를 키우기 위해서였고, 애들이 다 자란 지금은 혼자에 익숙해져서일 뿐이다. 언니는 죽은 형부를 그리워나 할까. 꿈이라도 꿀까. 이젠 얼굴.. 2006. 4. 12. 有朋自遠方來 오늘 너를 만나기 위해 어제부터 설레었어. 멈추지 않는 창밖의 바람 탓만은 아니였지. 내가 고향을 떠나온 후 운이 좋으면 일 년에 몇 번 스치듯 아쉽게 만났지. 깊은 이야기 할 틈도 없이, 몇 마디의 안부와 한숨만으로도 시간은 늘 부족하여 해갈되지 않은 마음으로 헤어지곤 했었지. 하긴 애초에 우리에겐 건너뛰어야 할 세월의 간극이 없다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어. 그래, 그것이 옳아. 오늘만 해도 그랬었지.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는 찰나에 우린 서로의 가슴 밑바닥까지 가 닿아버렸지. 돌아가야 할 시간을 가늠하지 않기로 한 오늘은 얼마나 자유로왔는지 몰라.. 오후의 시간이 우리 앞에 선물처럼 펼쳐져 있었지. 팔짱을 끼고 느리게 걸으니, 희희낙락 웃을 준비가 다 된 듯하였어. 교직에 매여있는 네가 자유로왔으면 .. 2006. 3. 31. 빠마의 추억 드디어 지붕개량을 했다. '빠마'를 했다는 말이다. 머리카락을 화학약품으로 고문함에 있어서는, 점잖은 발음보다 빠마라고 해야 더욱 실감난다. 머리를 볶기 위해 미용실에 간 것은 아니었다. 늘 하듯이 그저 컷이나 하려고 갔었다. 가늘고 힘이 없는 내 머리카락은 조금만 길어도 납작.. 2006. 3. 24. 이전 1 ··· 36 37 38 39 40 41 42 ··· 4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