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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406

잊은 시간 얼마 전, 티스토리 블로그의 홈화면이 새로 바뀌었다.(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좋으련만, 효율적으로 바뀌지도 않았다.)휴대폰으로 연 내 블로그 첫 화면에 '인기글'이라고 주욱 떠 있었다.바뀌기 전에도 있던 통계 메뉴지만 굳이 전면으로 새로 배치되어 보기만 산만해졌다.옛날 글일수록 조회 1회가 대부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글은 '인기글' 반열에 올라 있었다.'인기'라는 단어의 뜻이 나 모르게 변했나 보다. 어느날, 그 인기글 아닌 인기글 목록에 '막걸리를 위하여'라는 제목이 보였다.20여 년 블로그 글을 올렸지만 나는 제목을 보면 어떤 내용을 썼었는지 대강  떠오르곤 한다.그런데 '막걸리를 위하여'는 생전 처음 보는 제목이었다.더구나 배부른 막걸리를 좋아하지도 않는 주제에 내가 저런 글을 썼다고? 전혀.. 2024. 11. 6.
폭염이니까 그래 #1매일 찌는 듯이 더웠다.더위를 유독 타는 나는 집에 숨어있다가 해가 지면 슬금슬금 마트에 가거나 산책을 했다.잘하면 후천적 드라큘라도 될 수 있겠다.그러나 낮에 봐야 하는 볼일도 있어서, 이를테면 오늘처럼 은행에 가려면 되도록 이른 아침에 나가곤 했다. 골목길 내 앞에 자그마한 할아버지가 가고 있다.시장에 가시는 듯 가정용 카트를 돌돌 끌고, 아니 그런데 저것은 양산...?서울도 아니고 신세대도 아니고, 이른바 '경상도 남자'로 평생 살아오셨을 저 노인이 여성용 양산을 쓰고 있었다.짙은 네이비 바탕에 자잘한 무늬가 있는데, 꽃무늬인지 도형인지는 모르겠다.그러나, 폭염이니까 모든 것이 다 수긍되었다. #2매일 찌는 듯이 더웠다.횡단보도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곁의 아주머니는 연신 손수건으로.. 2024. 9. 20.
쓸데없는 추리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환기를 위해 한 뼘 열어둔 베란다 바깥창으로 차락차락 빗소리가 들어와 머리맡에 내내 머물렀다. 빗속에 누워 잠을 자는 듯했다. 커피를 들고 창에 붙어 서서 바깥을 본다.비스듬히 아래 이웃 빌라의 옥상에 빨래가 빗속에 있다.타월이 세 개, 팬티가 2개, 티셔츠 하나, 그리고 초록색 이태리 긴 타월이 비를 맞고 있다.어제도 비가 종일 오락가락했는데,  그렇다면 대체 저 빨래는 언제 해서 언제 넌 것일까.오늘이 아님은 분명하다, 내가 목격하는 지금은 새벽 5시니까.빨래의 주인은 그제나 그끄저께 빨래를 해서 널어두고 어딘가 멀리 떠났을 것이다.그 사람은 비 예보를 알지 못했거나 알았어도 믿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래야 저 풍경이 말이 된다.멀리 있는 그 사람은 거둬들이지 못한 자신의 빨래.. 2024. 7. 16.
주여, 때가 되었습니까? 날이 더워지니 밥맛이 슬슬 떨어진다. 계절 상관없이 따끈한 국과 찌개를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빈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이럴 때는 뭐다?글치, 열무물김치!정답을 알고 있지만, 나 먹자고 음식을 하기란 참 성가셔서 예년보다 그 시작이 늦었다.시작을 하면 여름 내내 지속되어야 하니, 지속 가능한 일을 시작할 때는 결심이 필요한 법이다. 싱싱한 열무 한 단을 샀다.다듬어 절여놓은 다음, 물김치 분량만큼 잡은 물에 밥 한 공기 넣어 폭폭 끓인다.열무물김치는 엄마가 하던 방식대로 고춧가루 없이 뽀얗게 하는데, 밀가루나 찹쌀가루 아닌 밥을 넣어 끓여 식힌 밥물이다.열무 외는 다 집에 있는 부재료도 손질했다.색을 더해 줄 당근과 양파 채 썰고, 매콤한 땡초 네댓 개 분질러 두고, 마늘 몇 쪽 편 썰고, 드디어 김치통에.. 2024. 6. 17.
가지가지 #1 바늘이 굵어서 조금 따끔하실 거예요, 간호사는 상냥하게 말했다. 네, 괜찮아요, 혈관이나 잘 나오면 좋겠어요. 오른쪽 팔에서 채혈 후 붙여둔 알코올 솜을 보더니 그녀는 왼팔을 선택했다. 혈관이 잠복해 있을 법한 곳을 톡톡 두드리며 탐색했지만 왼쪽 팔은 신통찮았다. 역시 오른팔이 좋군요. 그녀는 능숙하게 오른쪽 손목과 팔꿈치 사이 어디쯤에 바늘을 꽂았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따끔했다. 그렇게 CT촬영을 위한 조영제가 들어갈 채비를 끝냈다. #2 1년에 한 번 점검 차원에서 하는 CT촬영이다. 닫아두었던 주삿바늘 캡을 열자 조영제가 혈관으로 흘렀다. 우리의 피돌기는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순식간에 내 몸을 돌아 내려가나 보다. 조영제의 흐름은 선명한 뜨거움으로 감지되었다. 목 근처가 뜨겁더니 곧 가.. 2024. 4. 12.
밥 짓다 아침밥을 지었다.아침에는 빵과 과일로 충분하기 때문에 밥을 지을 이유가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새해 첫날, 밥의 향기로 집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쿠쿠여사의 진행에 따라 칙칙폭폭 밥이 달려가는 동안, 나는 새해 첫 커피를 느긋하게 마셨다. 밥이 똑 떨어진 것은 사실 어제였다.어제 아침 역시 평소처럼 빵을 먹었으니 말하자면 저녁밥이 없었던 것이다.그렇다고 한 해의 마지막 저녁에 굳이 밥을 지어 이듬해로 묵은밥을 넘기기는 어쩐지 싫었다.한번에 5인분 정도의 양을 지어서 소분보관하기 때문이다.예전의 나였다면 날짜가 무슨 상관이냐며 똑같은 하루일 뿐이라고 했을 것이다.늙는 게야, 이런 것이 늙는 증거지.늙고 있는 나는 밥 대신 라면으로 12월 31일 한해의 마지막 저녁을 해결하였다. 굳세게 하루 버텨 드디어 오늘 .. 2024. 1. 1.
국수 혹독했던 여름을 지나는 동안 나를 굶어 죽지 않게 했던 건 국수였다. 해마다 여름을 유난하게 힘들어하였다. 땀을 남보다 더 흘리면서도 잘 먹어내지를 못하니 몇 배로 더 지쳤다. 뜨뜻한 밥알을 씹는 상상만으로 입맛이 저만치 달아나곤 했다. 그러나 웃기게도 아침에는 뜨거운 커피와 따뜻한 빵을 먹었다. 밥알의 논리대로라면 시원한 아이스커피로 오장육부를 식혀야 마땅한데, 커피는 일 년 내내 뜨거운 커피여야 했다. 모순의 이중인격자여, 결국 그냥 밥이 싫었다는 것뿐이구먼. 그럴 때, 세상에는 국수가 있었다. 순결한 흰 국수는 나를 거슬리지 않고 호로록 매끄럽게 목구멍을 넘어갔다. 때로는 차갑게 때로는 매콤하게 내 배를 벌떡 일으켜, 씩씩하게 저녁 운동을 나가게 했다. 바로 그 점이 해로운 식사라는 건강상식쯤 나도.. 2023. 10. 31.
가을산 같은 #1 6월이 거의 끝나가던 어느 날, 카톡으로 누군가의 부고가 왔다. 부고의 주인공은 모르는 이름이었고 얼굴도 처음 보는 남자였다. 어, 이 사람이 누구지, 잘못 왔나? 중얼거리던 순간, 나는 머리를 때려 맞은 듯했다. 그의 이름에서 익숙한 닉네임을 유추해 낸 나는 잠시 멍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는 daum시절부터 오랜 블로그 친구였다. 어쩐지 최근 글을 올리지 않더라니, 어디가 아프셨나, 어디가 아프셨구나.... 그래도 그렇지, 이럴 수가. 나는 그를 알만한 지인들에게 카톡을 날려 진위를 확인하였다. 모두 부고를 받았고 마음 아파하는 중이었다. 다시 부고를 열어 그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한 번도 뵌 적 없었지만 짐작처럼 선하고 단정한 얼굴이었다. 그의 글과 같았다. #2 daum블로그에서 소통하던 이.. 2023. 8. 30.
취향저격 처음 본 넷플릭스 영화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아들 아이디에 숟가락 얹은 공유 프로필이라서, 뭘 보았는지 이력을 조회할 재주가 없다. 처음에는 주로 어워드 수상작에서 골랐는데, 올라온 영화들은 이미 보았거나 안 봐도 본 듯한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고를 영화가 많지 않으니 곧 관심이 멀어져서 한동안 넷플릭스를 잊었었다. 그러다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자 딱히 집에서 할 일이 없어 다시 띄엄띄엄 혹은 맹렬히 보기 시작했다. 나를 찾아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사랑이 지나간 자리, 그린북, 내 앞의 生, 와일드 라이프, 가재가 노래하는 곳, 파워 오버 도그, 아메리칸 세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단편영화를 뒤적거리던 어느날, 그동안 선택에서 제외하였던 외국 미니시리즈를 보았다. 미국 범.. 2023. 7.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