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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406

2년만의 해후 2년 전쯤에 마트 와인 코너에서 붉은 포도주를 한 병 샀었다.과일주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왜 샀는지 모르겠지만, 따지 않은 채 냉장고 아래칸에 내내 서 있었다.2년 동안 술을 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와인을 사고 얼마 되지 않았던 11월 초, 나는 간단한 암수술을 받았다.몇 개월 후 진료시간에 의사에게 물었다."와인 정도는 마셔도 되나요.?""1주일에 소주 한 잔 정도요.... 그런데 암세포도 함께 환호하겠죠?"아, 이건 마시지 말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이지.나는 사 둔 포도주 포함 세상의 모든 술을 마음에서 지워버렸다.진정한 술꾼이 아니었던 거야, 그런데 왜 포도주를 볼 때마다 쓸쓸하고 지랄일까. 생각해 보니, 오래전에 대학병원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받았을 때도 치과의자에 누운 채로 물었다.. 2023. 7. 17.
반항하는 노인 근처 체육공원으로 밤 운동 가는 길이었다. 골목길을 환히 비추는 가로등을 흘깃 올려보다가, 처음 보는 표지판을 발견하였다. 정확하게는 처음 보았다는 것일 뿐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높게 달려있기도 하였지만 운전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관심 표지판이 아니니까 말이다. 표지판이 새것처럼 깔끔한 걸로 봐서 설치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음 직했다. 그것은, 노인보호구역(Silver Zone) 표시였다. 이 동네가 낡아 재개발까지 추진 중이니 당연히 노인들도 많겠지만 그렇다고 보호구역까지? 나는 노인보호구역이란 표시판에 잠시 멍해졌다, 더구나 그 표시판 아래를 지나가는 머리 흰 나로선. 쳇, 누가 노인을 보호한다고, 이 좁은 일방통행 골목길에서 노인이 걸리적댄다면 그냥 밀고 가버리지 않겠어? 이런 시니컬한.. 2022. 11. 30.
문 닫기 daum은 블로그 페이지를 열 때마다 등을 떠밉니다. 이전... 참 생각만으로도 힘에 부칩니다. 아마 이 글이 daum 블로그에서의 마지막 포스팅이 되겠군요. 여름이 늘 힘든 사람입니다. 올여름도 예외는 아니어서, 참으로 많은 일을 지나고 나니 몸져 눕지도 않았건만 몸이 눈치를 채네요. 대상포진이 슬며시 재발을 했어요. 딱 2년 전 앓았는데 말이지요. 의사 말로는 100명 중 1명 정도 재발을 한다는데, 제가 그 어려운 걸 해내는 사람입니다, 흠흠.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9월 30일 마지노선이 며칠 안 남았네요. 블로그 친구들이 거의 떠나셨는지 새 글도 올라오지 않는군요. 저는 티스토리로 간 친구들 글을 읽을 수는 읽지만 아직 댓글 달 자격이 없으니 소통이 안 됩니다. 조금 쓸쓸해요. 휑한 철거동네에 혼.. 2022. 9. 24.
다시 그녀 이른 아침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녀를 다시 보았다. 옆집 아저씨가 119에 실려 가던 아침이었다. 두런거리는 여러 사람의 소리, 힘이 이쪽저쪽 쏠리는 듯한 불규칙한 발소리가 계단을 우르르 내려갔다. 깨어 있던, 아니 밤새 잠들지 못했던 나는 베란다로 나가 밖을 내다보았다. 놀랍게도 사이렌 소리도 없이 119 구급차가 도착해 있고, 팬티만 입은 옆집 아저씨가 들것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옆집 아저씨가 그렇게 키가 컸는지 아래를 내려다보며 처음 알았다. 구급차는 뒤따라 나온 옆집 큰아들을 보호자로 태우고 조용히 떠났다. 왜 쓰러졌는지, 아저씨가 무사한지, 그 뒤의 내용은 내가 알 수 없었다. 유일하게 안면 있는 40대 큰아들에게 구급차에 실려가는 댁의 아버지를 목격했는데 죽지 않고 살아 계시냐고 묻기엔 나는.. 2022. 2. 18.
까불다가 죽음 12월 첫날 아침, 식탁 옆 벽에 가만히 붙어있는 너를 발견했다. 배가 통통하게 부른 너는 고요히 휴식 중이었다. 흰 벽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나는 성급한 타격 대신 휴지를 몇 겹 감아쥐었다. 그리고 조용히 너를 눌렀다. 곧 휴지를 펼쳐 너에게서 회수한 나의 선명한 AB형을 확인하였다, 흡족하다. 너는 지난밤의 그 모기가 틀림없다. 이로써, 이 집에서의 유일한 동거자마저( 者 아닌데... 부를 말이 안 떠오름) 나는 골로 보내버렸다. 거울을 보니 목덜미에 세 방의 빨간 점이 한데 몰려 있다. 정확히 경동맥의 위치에 날카로운 빨대를 꽂은 것을 보면 고수였음에 분명하다. 하기는, 고작 내 피 한 방울을 너에게 적선하여 동거를 이어가는 것도 의미 있다. 늙어서 그런지 요즘은 물린 자국이 썩 가렵지도 않고 그저.. 2021. 12. 1.
물주머니 7월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나, 다리를 포개고 비스듬히 벽에 기대앉은 내 눈에 오른쪽 복숭아뼈가 들어왔다. 이상하게 불룩하고 부풀어 있었다. 지난밤 거대한 모기가 문 것일까. 피부 아래 메추리알 하나 정도가 들어있는 듯 도드라졌다. 부푼 부분을 손으로 누르면 말랑거리며 움직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려움이나 불편함은 전혀 없었다. 지방종, 뭐 이런 건가. 하지만 하루 밤만에? 몹시 걱정되었으나 통증이 없었다. 아파야 병원을 갈 텐데, 병원에 간다면 어떤 병원을 가나. 정형외과나 일반외과? 혹은 피부과? 나는 가라앉기를 기대하며 기다렸다. 수시로 나의 오른쪽 복숭아뼈를 만지고 들여다보았다. 조금 가라앉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았다. 왼쪽과 오른쪽은 짝짝이 발목이 되었다. "복숭아뼈 근처 아래에 물주머.. 2021. 10. 11.
그녀 그녀는 이른 아침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침 6시, 하늘은 이미 밝았지만 세상은 덜 깬 시간이었다. 습관대로 창을 열기 위해 베란다로 나갔을 때, 빌라 담너머 외진 골목에서 담배 피우는 그녀를 보았다. 창을 드르륵 연다면 그녀가 위를 볼 테지. 나는 창 열려던 손을 거두었다. 굳이 눈을 마주쳐서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방해하고 싶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녀가 나를 볼까 봐 몸을 숨겼다는 게 맞다. 그녀가 위의 나를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도 있건만, 어쩌면 나의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 푸석거리는 퍼머머리를 아무렇게나 묶고, 허름한 줄무늬 티셔츠와 반바지의 아줌마였다. 왼손 아귀에는 흰 종이를 구겨 둥글게 야구공처럼 쥐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사연 있어 보이게 했다. 그 외 겉으로 보.. 2021. 9. 12.
휴지가 물어다 준 나에게 8월은 해마다 고난의 달이었다. 올해도 예외는 없었다. 일상 중의 사고들이 몇 가지 일어났고, 땀만으로도 죽을 지경인 여름을 정말 힘들게 보냈다. (아직 다 보내진 않았네) 앞자리가 바뀌었던 몸무게가 아깝게 다시 원위치로 내려왔지만, 곧 가을이다. 들판이 익어가고 있고, 식욕이야 언제든 대기 중이니까. 태풍에 이어 질기고 격한 물폭탄 때문에 며칠 동안 세탁을 하지 못했다. 엊그제 금요일 밀린 옷가지 몇을 돌렸다. 반가운 해가 쨍한 베란다에 널려고 보니, 검은 바지에 눈이 하얗게 내려있다. 이기 머꼬, 방금 빨았...는데? 아.... 바지 호주머니에 휴지 두 장을 넣었던 기억이 난다. 얇은 여름용 천이라 호주머니 검사를 겉에서 만져보며 확인했던 것이 사단이었다. 부드러운 휴지 두 장의 부피감을 만져.. 2021. 8. 29.
굴뚝 있던 하늘 우리 집 한 블럭 앞 골목에는 오래된 목욕탕 건물이 있다, 아니 있었다. 헬스까지 구색을 나름 갖춘 동네 사우나였다. 얼마 전 그 건물을 허물었는데, 긴 코로나 시대에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그리고 굴뚝만 남았다. 내가 본 굴뚝 중에 가장 높은 굴뚝이었다. 아주 오래 전 지어 올렸는지, 요즘 도시에 그렇게 높고 낡은 굴뚝은 쉽지 않았다. 거실에서 정통으로 바로 보이는 그 거대한 굴뚝은 내 몫의 하늘을 반으로 분할하였다. 가끔 구름이나 달을 찍으려고 해도 굴뚝의 존재는 어느 각도에서나 피할 수 없었다. 차라리 굴뚝을 살려서 마치 빈티지를 의도한 것처럼 찍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굴뚝은 어디까지나 부속품일 뿐, 이제 목욕탕이 사라졌으니 굴뚝 너도 곧 끝이얏! 나는 저 높은 굴뚝을 어떻게 허물지 너.. 2021. 5.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