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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407

휴지가 물어다 준 나에게 8월은 해마다 고난의 달이었다. 올해도 예외는 없었다. 일상 중의 사고들이 몇 가지 일어났고, 땀만으로도 죽을 지경인 여름을 정말 힘들게 보냈다. (아직 다 보내진 않았네) 앞자리가 바뀌었던 몸무게가 아깝게 다시 원위치로 내려왔지만, 곧 가을이다. 들판이 익어가고 있고, 식욕이야 언제든 대기 중이니까. 태풍에 이어 질기고 격한 물폭탄 때문에 며칠 동안 세탁을 하지 못했다. 엊그제 금요일 밀린 옷가지 몇을 돌렸다. 반가운 해가 쨍한 베란다에 널려고 보니, 검은 바지에 눈이 하얗게 내려있다. 이기 머꼬, 방금 빨았...는데? 아.... 바지 호주머니에 휴지 두 장을 넣었던 기억이 난다. 얇은 여름용 천이라 호주머니 검사를 겉에서 만져보며 확인했던 것이 사단이었다. 부드러운 휴지 두 장의 부피감을 만져.. 2021. 8. 29.
굴뚝 있던 하늘 우리 집 한 블럭 앞 골목에는 오래된 목욕탕 건물이 있다, 아니 있었다. 헬스까지 구색을 나름 갖춘 동네 사우나였다. 얼마 전 그 건물을 허물었는데, 긴 코로나 시대에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그리고 굴뚝만 남았다. 내가 본 굴뚝 중에 가장 높은 굴뚝이었다. 아주 오래 전 지어 올렸는지, 요즘 도시에 그렇게 높고 낡은 굴뚝은 쉽지 않았다. 거실에서 정통으로 바로 보이는 그 거대한 굴뚝은 내 몫의 하늘을 반으로 분할하였다. 가끔 구름이나 달을 찍으려고 해도 굴뚝의 존재는 어느 각도에서나 피할 수 없었다. 차라리 굴뚝을 살려서 마치 빈티지를 의도한 것처럼 찍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굴뚝은 어디까지나 부속품일 뿐, 이제 목욕탕이 사라졌으니 굴뚝 너도 곧 끝이얏! 나는 저 높은 굴뚝을 어떻게 허물지 너.. 2021. 5. 31.
체중계 위에서 겨울은 탄수화물의 계절이다. 특히 이번 겨울은 더했다. 치과치료를 받느라 부드럽고 편한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니 상온이라도 차가운 과일이나 채소들은 내 치아를 더 힘들게 했다. 그렇다고 치아 시린 것을 피하기 위해 샐러드나 과일을 따끈하게 데워 먹을 순 없었다. 귤도 입에 물고 체온으로 잠시 데운 후 조심조심 씹곤 했다. 반면, 맛있는 탄수화물 폭탄은 겨울과 특히 어울렸다. 떡국, 만둣국, 떡만둣국, 칼국수, 김치국밥, 군고구마, 호박죽, 그리고 라.면. 도대체 TV에서는 왜 그토록 라면을 끓여대는지, 라면회사와 모종의 결탁이 있을 거라는 음모설을 조심스레 제기해 본다. 급기야 조인성까지 대게라면을 끓이고, 불행한 연인들도 툭하면 노랑냄비에 라면을 끓이며 불행을 소꿉장난으로 승화시켰다. 화면.. 2021. 3. 18.
잔소리 #1 베란다의 감자를 처리해야 했다. 이미 시들어 쪼글쪼글한데, 이러다 싹마저 나면 버릴 수밖에 없다. 시든 껍질은 물기를 잃어 칼날을 매끄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뭉텅뭉텅 두껍게 깎인다. 아깝다. 드러나는 속살은 초록색이다. 이를테면 감자의 탈을 쓴 키위. 빛을 많이 쬐면 초록 감자가 된다지만, 내 수준에서 짐작해 보면 그냥 추위에 파르라니 질린 게 아닐까. 뚬벙뚬벙 썰어 냄비에 담고 소금과 그린스위트를 한 스푼씩 넣어 삶는다. 조리의 과정은 그게 다다. 큼직한 반찬용 감자인데, 구입할 때는 감자채 볶음을 염두에 두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유효기간은 한참 지났다. 이제는 감자의 용도가 아니라 나의 용도대로 쓰기로 했다. 반찬용 감자지만 삶아 먹고 싶으니 그리 하는 것이다. 맛있는 냄새가 어느새 퍼진다.. 2021. 2. 24.
향기를 위하여 #1 아침에 일어나면 미지근한 물부터 한 잔 가득 마신다. 밤새 말라있던 오장육부를 깨우기 위해서다. 아침 공복에 물 마시기를 습관으로 안착시키려고 노력 중인데 겨우 6개월 남짓 되었다. 여기까지는 꽤 모범적으로 보인다. 물 마시고 5분가량 지나면 커피물을 올린다. 그때 찰나의 갈등이 스친다. 커피를 큰 잔으로 배 부르게 마실까, 작은 잔으로 간에 기별만 줄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배 부르게'다. 건강인으로 거듭나려면 공복 물 마시기도 좋지만, 공복 커피부터 끊는 게 옳다. 하지만 나는 애초 그딴 훌륭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녹차를 마시자고 결심을 아무리 해도 커피 카페인, 특히 공복 카페인이 좋다. 그래서 먹다 남은 고급 녹차는 방향방습제로 전락하기 일쑤다. 호모 커피쿠스. #2 뻥튀기 한 봉지를 .. 2021. 1. 12.
뜨거운 아침 상추만 먹어도 손톱은 잘 자랐다. 내 영양은 말 그대로 손톱만큼 쓰이고, 나머지는 모두 아랫배에 고이 간직되는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는 누룽지를 먹기로 한다. (누룽지는 절대 사지 않고 직접 만듦) 원래 뜨거운 국물음식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이 여름에 누룽지가 먹고 싶은 건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 만들어 둔 마른 누룽지를 한 주먹 꺼내 물을 부어 불린 후 푸욱 끓인다. 덜 퍼져서 치아에 들러붙는 누룽지는 진정한 누룽지가 아니다. 누룽지가 끓는 사이 양상추, 토마토, 노란 파프리카로 샐러드 준비. 냉장고에 있는 대로 담고 보니 의도치 않게 신호등 컨셉이다. 채소를 많이많이, 과일은 적당, 무엇보다 탄수화물을 적게. 하지만 이보다 더 어떻게 줄여? 그 넘의 중성지방이 왜 높을까 실로 모르겠는 내 식생활인데... 2020. 7. 4.
초식 #1 아래층 아저씨가 상추 봉지를 내밀었을 때, 나는 하마터면 필요 없다고 말할 뻔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상추가 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일 뿐 무례한 거절의 뜻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조금 전 나는 늦은 점심으로 상추쌈을 미어지게 먹었고, 또 먹어내야 하는 상추가 많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듣는 상대방은 불쾌할 것이라는 찰나적 판단으로 나는 공손히 상추를 받았다. 아래층 아저씨는 밭에서 끝물로 따와서 나눈다며 멋쩍게 말했다. 나는 감사한(이런 위선적인!) 표정으로 그러시냐고, 잘 먹겠다며 웃었다. #2 솔직히 말하면, 반갑지 않았다. 아직 많은 내 냉장고의 상추는? 식구도 없는데, 이렇게 많이... 이따위 배부른 난감함이 스쳤다. 무엇보다도, 상추 봉지를 받아 드는 순간부터 든 생각은, 아 또 뭘로 .. 2020. 6. 11.
미련하고 소란하게 #1. 지난 연말 한 달 넘게 집을 비웠던 후유증을 나의 냉장고가 호되게 겪었다. 처음 돌아와 냉장실 내용물이 약하게 얼어 있음을 알았을 때, 그건 당연하다고 여겼다. 꽉 닫힌 채로 한 달 넘게 견디었으니 이 정도는 얼어줘야지. 이젠 냉장고 문을 하루에 수없이 열고 닫을 테니 곧 녹아내.. 2020. 2. 13.
그가 지나간다. 시장 거리에서 나와 큰 찻길 방향으로 간다. 그는 자유롭게 걷는다. 두 손엔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다. 사자 갈기 같은 긴 봉두난발 덕에 가뜩이나 큰 두상이 더 크다. 어젯밤에는 버스 정류소에 앉아 있는 그를 보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주변에 서서 각자의 휴대폰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은 비단 그가 비스듬히 의자 여러 개를 차지하고 앉은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우리 동네 대표 걸인이다. 노숙자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가 진실로 걸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가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없다. 그러나 주변 가게들과 주민들이 그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베풀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는 다른 지역으로 떠나지 않고 언제나 우리 동.. 2019. 10.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