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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404

향기를 위하여 #1 아침에 일어나면 미지근한 물부터 한 잔 가득 마신다. 밤새 말라있던 오장육부를 깨우기 위해서다. 아침 공복에 물 마시기를 습관으로 안착시키려고 노력 중인데 겨우 6개월 남짓 되었다. 여기까지는 꽤 모범적으로 보인다. 물 마시고 5분가량 지나면 커피물을 올린다. 그때 찰나의 갈등이 스친다. 커피를 큰 잔으로 배 부르게 마실까, 작은 잔으로 간에 기별만 줄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배 부르게'다. 건강인으로 거듭나려면 공복 물 마시기도 좋지만, 공복 커피부터 끊는 게 옳다. 하지만 나는 애초 그딴 훌륭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녹차를 마시자고 결심을 아무리 해도 커피 카페인, 특히 공복 카페인이 좋다. 그래서 먹다 남은 고급 녹차는 방향방습제로 전락하기 일쑤다. 호모 커피쿠스. #2 뻥튀기 한 봉지를 .. 2021. 1. 12.
뜨거운 아침 상추만 먹어도 손톱은 잘 자랐다. 내 영양은 말 그대로 손톱만큼 쓰이고, 나머지는 모두 아랫배에 고이 간직되는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는 누룽지를 먹기로 한다. (누룽지는 절대 사지 않고 직접 만듦) 원래 뜨거운 국물음식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이 여름에 누룽지가 먹고 싶은 건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 만들어 둔 마른 누룽지를 한 주먹 꺼내 물을 부어 불린 후 푸욱 끓인다. 덜 퍼져서 치아에 들러붙는 누룽지는 진정한 누룽지가 아니다. 누룽지가 끓는 사이 양상추, 토마토, 노란 파프리카로 샐러드 준비. 냉장고에 있는 대로 담고 보니 의도치 않게 신호등 컨셉이다. 채소를 많이많이, 과일은 적당, 무엇보다 탄수화물을 적게. 하지만 이보다 더 어떻게 줄여? 그 넘의 중성지방이 왜 높을까 실로 모르겠는 내 식생활인데... 2020. 7. 4.
초식 #1 아래층 아저씨가 상추 봉지를 내밀었을 때, 나는 하마터면 필요 없다고 말할 뻔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상추가 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일 뿐 무례한 거절의 뜻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조금 전 나는 늦은 점심으로 상추쌈을 미어지게 먹었고, 또 먹어내야 하는 상추가 많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듣는 상대방은 불쾌할 것이라는 찰나적 판단으로 나는 공손히 상추를 받았다. 아래층 아저씨는 밭에서 끝물로 따와서 나눈다며 멋쩍게 말했다. 나는 감사한(이런 위선적인!) 표정으로 그러시냐고, 잘 먹겠다며 웃었다. #2 솔직히 말하면, 반갑지 않았다. 아직 많은 내 냉장고의 상추는? 식구도 없는데, 이렇게 많이... 이따위 배부른 난감함이 스쳤다. 무엇보다도, 상추 봉지를 받아 드는 순간부터 든 생각은, 아 또 뭘로 .. 2020. 6. 11.
미련하고 소란하게 #1. 지난 연말 한 달 넘게 집을 비웠던 후유증을 나의 냉장고가 호되게 겪었다. 처음 돌아와 냉장실 내용물이 약하게 얼어 있음을 알았을 때, 그건 당연하다고 여겼다. 꽉 닫힌 채로 한 달 넘게 견디었으니 이 정도는 얼어줘야지. 이젠 냉장고 문을 하루에 수없이 열고 닫을 테니 곧 녹아내.. 2020. 2. 13.
그가 지나간다. 시장 거리에서 나와 큰 찻길 방향으로 간다. 그는 자유롭게 걷는다. 두 손엔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다. 사자 갈기 같은 긴 봉두난발 덕에 가뜩이나 큰 두상이 더 크다. 어젯밤에는 버스 정류소에 앉아 있는 그를 보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주변에 서서 각자의 휴대폰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은 비단 그가 비스듬히 의자 여러 개를 차지하고 앉은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우리 동네 대표 걸인이다. 노숙자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가 진실로 걸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가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없다. 그러나 주변 가게들과 주민들이 그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베풀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는 다른 지역으로 떠나지 않고 언제나 우리 동.. 2019. 10. 24.
에티오피아産 위로 #1 몇 날 며칠 비가 내린다. 비 오는 날씨를 싫어하진 않았는데, 곧 싫어질 것 같다. #2 장마로 집에 갇혀서 본의 아니게 여기저기 정리를 한다. 오늘은 화장대 속옷 칸을 정리했다. 입었던 기억조차 까마득한 내복과 올인원과 자수 요란한 언더웨어가 아직 있었다. 매끄러운 속치마도 몇 개나 나왔다. 다 버렸다. 이젠 이따위가 필요 없단다. 몇 년 전에는 버리지 않았던 비싼 가방과 옷도 몇 년 지나니 버리게 된다. 마흔에 버리지 못했던 것을 쉰에는 미련 없이 버리고, 쉰에 버리지 않았던 것을 쉰다섯 넘어서는 버렸다. 나는 늘 혹시나를 보관하였다. #3 졸렬하고 비생산적인 정치인들 입씨름에 기가 막힌다. 정치판은 우물인가, 거기만 들어가면 개구리가 되어 그 명석한 대갈통들도 소용이 없다. 일본이 한국을 드러.. 2019. 7. 28.
복수와 내조 사이 늦은 저녁을 먹고 공원으로 간다. 남 보기에는 운동으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나에겐 하루의 중요한 마침표다. 산책을 이미 마친 듯한 운동복 차림의 노부부가 공원 쪽에서 마주 걸어온다. 두 분 다 족히 임신 7개월 배와 땅딸한 체구를 가졌다. 할아버지가 앞서고 할머니는 두어 걸음 뒤다. 할아버지가 팥빙수 가게 앞에 멈추어 넓은 유리창 안을 들여다본다. 그러더니 몇 걸음 뒤의 할머니를 돌아보며 제안한다. "우리 하나 시켜서 갈라 묵으까?" 할머니 0.5초 단칼에 답한다. "나는 단것 안 좋아한다." (포스 대단하심) 여전히 팥빙수 창 앞을 떠나지 못하지만 할아버지는 두 번 조르지 않는다. 덤덤한 표정의 할머니는 팥빙수 가게 안을 일별도 않고 전방주시, 가던 길 간다. 그들을 스쳐 지나며 웃음을 참는다. 하나 시.. 2019. 6. 5.
작심 3件 작심 3일이라고? 왜 기간을 정해서 실패를 자초하나? 나는 잔머리 돌려 건수로 정하였다. 1, 고기 먹기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감기몸살을 심하게 하였다. 그 몸살 주간에 내 생일이 있었지만, 생일이고 뭐고 기다시피 누룽지를 겨우 끓여 먹었다. 뜨거운 보리차와 누룽지와 콩나물국으로 연명하며 열흘쯤 앓고 나니 영혼이 털린 듯 휑하였다. 그런데 몸무게 3kg도 영혼과 함께 털렸다. 오, 안돼! 나이 들어 아픈 후 체중감소는 근육 실종을 의미하니까. 이제 적어도 1주일에 한번은 돼지고기를 먹어야 할 때가 왔다. T.V.에서 많은 의사들이 추천하던 그 돼지 다릿살로. 앞다리든 뒷다리든 지방 적고 단백질은 최고라는 그 돼지 다릿살로. 아들이 집을 떠나고부터 육류를 거의 먹지 않았다. 나 먹자고 고기를 요리하는 번거로.. 2019. 2. 19.
가끔은 밤 외출 #1 24센티 볶음팬과 사각 찬기 2개를 사서 쇼핑몰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밤이었다. 털모자 쓴 내 머리를 겨울 밤공기가 시원하게 식혀 주었다. 잠시 후 도착한 집으로 가는 버스는 아쉽게도 만원이었다. 앞(前) 정류소가 버스 회차 지점이라 거기서 버스는 꽉 차 버리곤 했다. 나는 찬 공기가 좋아 앞 정류소까지 걷기로 했다. #2 큰길을 건너 골목으로 들어선 것은 나의 의도된 동선이었다. 옛날에는 그저 질러가는 용도의 좁은 골목이었는데 요즘은 온통 카페와 술집 밥집으로 채워졌다. 그 유명한 서면 전포동 카페거리. 얄팍한 가게의 벽을 뚫고 흘러나온 음악은 서로 섞이고 방해되어 도무지 무슨 음악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좁은 골목은 청춘들로 넘쳐나서, 가만히 서 있어도 떠밀려 흘러갈 것 같다. 맞은편에서 여자(애.. 2019. 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