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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404

우중 헛소리 #1 버스 차창 밖으로 아래위 하얗게 옷을 입은 여자가 우산을 쓰고 걸어간다. 흰 니트 티셔츠에 헐렁한 흰 바지를 입었다. 쳇, 멋있자너. 심지어 날씬하고 키마저 크다. 비 오는 날 흰옷을 입고 나서다니, 참으로 용감하다. 분명 바지 끝이 흙탕물에 젖었을 꼬야.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그.. 2016. 7. 16.
차고 넘치는 운명 저녁 산책 겸 시장에 가기 위해 골목길을 걷던 중이었다. 남녀 대학생 둘이 머리를 맞대고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지나치며 슬쩍 내려다본다. 학생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새끼 고양이였다! 여태까지 내가 만난 길고냥이 중에서 가장 어리고 작아 보였다. 뻥.. 2016. 7. 5.
반지 아들의 손가락에서 무언가가 반짝 빛났다. 커플링 했나? 응. 니가 골라 샀어? 응. 성의는 갸륵하다만, 링 디자인이 별로라는 말은 입 밖으로 뱉지 않고 삼켰다. 쉐끼, 남 하는 짓은 다 하는구나. 그래, 알아서 이별도 하고 사랑도 하면서 그리 살아가거라. 아들의 연애와 결혼에 목숨 거는 .. 2016. 6. 15.
흔적 #1 머리를 풀어헤친 저 헐벗은 나무는 머지않아 자신이 배롱나무임을 고백할 것이다. 이제 막 가지에 잎이 돋고, 촌핑크의 꽃이 피기 시작하면 노골적인 그 꽃들 때문이라도 정체를 숨길 수 없다. 나는 나무 아래 푸른 원형을 본다. 나무가 펼쳐진 딱 그만큼의 땅은 푸르다. 참으로 정직하다. 앙상한 가지 사이로 햇살과 바람 고루 들락거렸을텐데, 나무는 무성했던 제 면적을 굳이 지킨다. 나무 아래는 이끼가 끼고 초록이 남았고, 나무 밖은 계절에 순응하며 노랗게 메말랐다. 우주선 같다. 세상 만물 어느 것도 자신의 과거를 떠날 수 없구나. 남지 않는 흔적이란 없다. #2 오늘따라 하루 종일 3층 할머니의 호통이 심하다. 영감님이 저지레를 심하게 하시는지 아침부터 할머니의 욕설이 4층까지 들려온다. 험악한 욕설과 .. 2016. 4. 4.
2월 #1 잠깐씩 춥기는 해도 시절은 이미 봄이다. 혹시 얼어 죽고 싶은 목련이라도 폈나 싶어 며칠 공원을 들락거렸다. 그러다가 나는 놀라운 사실을 새삼 발견했다. 목련 나무도 수피가 제법 희다는 사실이었다. 목련 나무마다 차이는 있지만, 주로 회백색이거나 연회색을 띠고 있었다. 자작만.. 2016. 2. 22.
바람 싫어 따뜻한 겨울이라 했더니 보란 듯이 쨍 겨울다워졌다. 바다가 가까워 그런지 어마어마한 음향효과의 바람이 이틀째 존재감 과시 중이다. 노란 길냥이가 지상 30센티 떠서 달려와서 깜짝 놀라 보니 오렌지색 비닐봉지였다. 이젠 골목길에서 뭔가가 재빨리 움직이면 응당 고양이라고 생각하는 이 동네주민 1. 쓰레기들은 길가로 뭉쳐 구르고 여자들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구치곤 했다. 털모자, 안경, 뚱뚱한 오리털, 부츠로 전투무장하여 강풍을 뚫고 볼일을 보고 오니 녹초가 되었다. 내 무게에 짓눌려 힘이 배로 들었다. 바람만 사라지면 한결 좋을 텐데. ㅡ 흰 점은 반달임 어제 저녁 공원의 온도계는 영하 3도를 가리켰다. 초저녁에 저 정도니 새벽녘에는 더 내려갈 태세다. 이만하면 이 도시에선 최전방 급이다. (부산 이북지역 .. 2016. 1. 19.
벌써 봄? #1 새해가 되었다. 한 살 더 먹었다. 새해가 되면 전국민이 동시에 한 살씩 더 먹는 세계 유일의 한국식 나이법이 아니라도 이른 내 양력 생일 탓에 명실공히 한 살 더 먹었다. 나는 아직 생일이 안 되었으니 어림없다고 뻗댈 명분조차 없어졌다. 이럴 때는 이른 생일이 그다지 좋은 것이 아.. 2016. 1. 8.
12월 남포동 지하철 남포역 7번 출구 오후 3시. 장소와 때를 점찍어 친구들을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설렌다. 때마침 하늘은 점점 낮아지고 밤에는 비가 예보되어 있다. 낮술을 시작하기 좋은 조건이야, 더구나 12월.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되는 따뜻한 사람들. 어디로 흘러갈 것이지 계산할 필요 없는 중구난방 대화들. 농담과 진심과 위로를 잘 구별하는 우리들의 빛나는 늙음. 느릿느릿 산책. 밥과 술 with 생선회. 즐거운 시간은 언제나 순식간에 지나고, 지나버린 시간은 그리움의 영역이다. 연말, 모두 좋은 사람들과 조우하시기를. 남포동 대형트리. 어찌나 요란찬란한지 色을 쥐겼음. 2015. 12. 16.
취조의 기술 #1 공원을 빠져나가는 사잇길로 들어서서 몇 걸음 옮기던 참이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자세히 보니 어두컴컴한 벤치에 부부인 듯한 중년 남녀가 앉아 있었다. 동백꽃이 어둠 속에서 희다. "희경이? 첨 듣는 이름이네? 내 아는 사람 중엔 이 이름 없는데." "....." 여자는 손가락으.. 2015.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