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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407

증상 #1 사흘째 비가 내린다. 가을장마인가. 가을이라고는 하지만 늦더위가 심해서 한낮은 여전히 여름이었다. 여름처럼 끈적였고, 여름처럼 양산을 쓰고, 여름처럼 반소매를 입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제야 비로소 바람이 서늘하고, 새벽녘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더 쌀쌀해지면 좋겠다. #2 사진찍기 놀이도, 초라한 글쓰기도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잊었다. 그래서 편안하였다. 방치하여도 무방해 보였다. 흔히, 쉬다 보면 또 울컥 쓰고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고, 그때 다시 수다를 풀면 된다고들 말하지만, 나는 내버려 두면 영영 강물처럼 떠내려 가버릴 것을 안다. 한번 흘러간 물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내가 그렇게 가버릴까 봐, 차마 내 손을 놓지 못한다. 어느 낯선 기슭에 당도하여 그립게 바라볼까 봐.. 2016. 9. 30.
Merry 추석!! #1. 지진이 온 나라를 흔들고 지나간 후 깊은 밤에 나는 염색을 했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흰 뿌리, 너는 용서 못 해. 사과나무 심겠다던 스피노자를 이해하였다. #2. 제사도 없고, 모시고 사는 어른도 없으니 명절이라고 별다른 준비가 필요 없다. 외동 아덜놈이 내려오면 먹일 .. 2016. 9. 13.
여름 후유증 #1 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 서 있었다. 암만 스캔해 봐도 먹을 반찬이 없다. 그제 열무김치 통을 깨끗이 씻어 엎어 더 그렇다. 가장 소극적 단백질원인 달걀마저 떨어졌건만 채워놓질 않았다. 그동안 가능한 한 가스 불을 멀리한 결과다. 생수 싫어하는 내가 물까지 다 사다 먹었다. 끼니는 .. 2016. 9. 9.
귀신도 아닌 주제에 침대 아래를 조심스레 들여다 본다. 참혹한 모습의 귀신이 거기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져서 벌벌 긴다. 비명과 우당탕으로 텔레비젼 속이 요란하다. 나는 이제 귀신 장면에 썩 놀라지 않는다. 무덤덤하거나, 속으로 에구 지랄을 해라 분장이 그기 머꼬, 이런다. 대개 컴퓨터로 후처리된 귀신 몰골을 보여주기 때문에 우습기도 하고 기술적인 감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나 같은 시청자만 있는게 아니니까, 방송사들은 귀신 아이템을 지치지도 않고 여름마다 써먹는다. 귀신도 한철이라고, 너그럽게 봐 줘야지 어쩌겠냐. 혼자서 귀신 드라마를 보던 바로 그때! 띵똥~. 벨이 울렸다. 헉!!!! 거짓말 보태면 간이 발등까지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니 밤 12시가 가까웠다. 이 오밤중에 벨 누를 사람이 도대체 없.. 2016. 8. 9.
우중 헛소리 #1 버스 차창 밖으로 아래위 하얗게 옷을 입은 여자가 우산을 쓰고 걸어간다. 흰 니트 티셔츠에 헐렁한 흰 바지를 입었다. 쳇, 멋있자너. 심지어 날씬하고 키마저 크다. 비 오는 날 흰옷을 입고 나서다니, 참으로 용감하다. 분명 바지 끝이 흙탕물에 젖었을 꼬야.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그.. 2016. 7. 16.
차고 넘치는 운명 저녁 산책 겸 시장에 가기 위해 골목길을 걷던 중이었다. 남녀 대학생 둘이 머리를 맞대고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지나치며 슬쩍 내려다본다. 학생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새끼 고양이였다! 여태까지 내가 만난 길고냥이 중에서 가장 어리고 작아 보였다. 뻥.. 2016. 7. 5.
반지 아들의 손가락에서 무언가가 반짝 빛났다. 커플링 했나? 응. 니가 골라 샀어? 응. 성의는 갸륵하다만, 링 디자인이 별로라는 말은 입 밖으로 뱉지 않고 삼켰다. 쉐끼, 남 하는 짓은 다 하는구나. 그래, 알아서 이별도 하고 사랑도 하면서 그리 살아가거라. 아들의 연애와 결혼에 목숨 거는 .. 2016. 6. 15.
흔적 #1 머리를 풀어헤친 저 헐벗은 나무는 머지않아 자신이 배롱나무임을 고백할 것이다. 이제 막 가지에 잎이 돋고, 촌핑크의 꽃이 피기 시작하면 노골적인 그 꽃들 때문이라도 정체를 숨길 수 없다. 나는 나무 아래 푸른 원형을 본다. 나무가 펼쳐진 딱 그만큼의 땅은 푸르다. 참으로 정직하다. 앙상한 가지 사이로 햇살과 바람 고루 들락거렸을텐데, 나무는 무성했던 제 면적을 굳이 지킨다. 나무 아래는 이끼가 끼고 초록이 남았고, 나무 밖은 계절에 순응하며 노랗게 메말랐다. 우주선 같다. 세상 만물 어느 것도 자신의 과거를 떠날 수 없구나. 남지 않는 흔적이란 없다. #2 오늘따라 하루 종일 3층 할머니의 호통이 심하다. 영감님이 저지레를 심하게 하시는지 아침부터 할머니의 욕설이 4층까지 들려온다. 험악한 욕설과 .. 2016. 4. 4.
2월 #1 잠깐씩 춥기는 해도 시절은 이미 봄이다. 혹시 얼어 죽고 싶은 목련이라도 폈나 싶어 며칠 공원을 들락거렸다. 그러다가 나는 놀라운 사실을 새삼 발견했다. 목련 나무도 수피가 제법 희다는 사실이었다. 목련 나무마다 차이는 있지만, 주로 회백색이거나 연회색을 띠고 있었다. 자작만.. 2016. 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