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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406

12월 남포동 지하철 남포역 7번 출구 오후 3시. 장소와 때를 점찍어 친구들을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설렌다. 때마침 하늘은 점점 낮아지고 밤에는 비가 예보되어 있다. 낮술을 시작하기 좋은 조건이야, 더구나 12월.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되는 따뜻한 사람들. 어디로 흘러갈 것이지 계산할 필요 없는 중구난방 대화들. 농담과 진심과 위로를 잘 구별하는 우리들의 빛나는 늙음. 느릿느릿 산책. 밥과 술 with 생선회. 즐거운 시간은 언제나 순식간에 지나고, 지나버린 시간은 그리움의 영역이다. 연말, 모두 좋은 사람들과 조우하시기를. 남포동 대형트리. 어찌나 요란찬란한지 色을 쥐겼음. 2015. 12. 16.
취조의 기술 #1공원을 빠져나가는 사잇길로 들어서서 몇 걸음 옮기던 참이었다.어디선가 데시벨 높은 여자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자세히 보니 어두컴컴한 벤치에 부부인 듯한 중년 남녀가 앉아 있었다.동백꽃이 어둠 속에서 희다. "희경이? 첨 듣는 이름이네? 내 아는 사람 중엔 이 이름 없는데.""....."여자는 손가락으로 연신 휴대폰 화면을 끌어올리며 흥분하였다. 말 없는 남자는 목을 빼서 기웃이 넘겨다 보고 있었다.상황으로 보아 그 휴대폰은 분명 남자 자신의 것일 텐데, 검열당하는 자는 공손하다."이건 또 누고? 고순덕이, 김연숙이....."여자는 휴대폰 속 여자 이름을 다 읊을 작정이다."$@^&*.""그기 뭔 말도 안되는 소리고?"죄지은 사람은 목소리가 기어들고, 취조관은 복장이 터진다. 나는 걷는 속도를 최대한.. 2015. 11. 25.
#1 밥 먹다가 혀를 모질게 깨물었다. 악 소리 지를 만큼 놀라고 아팠다. "입안의 혀"란 싹싹하고 말 잘 듣는다는 뜻이련만 그 말이 무색하다. 어금니와 혀의 협업이 딱딱 박자 맞춰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다. 신체부속기관들이 점점 제 맘대로 논다. 혀를 길게 빼물고 거울로 보니, 상처도 났.. 2015. 10. 13.
암호처럼 #1 동사와 형용사 구분이 힘든 경우 어떻게 구별하지요? 아 그럴 때는, 현재진행 어미나 청유형 어미 '~하자'를 붙여 보세요. 말이 성립되면 동사이고, 아니면 형용사에요. 오모나, 진짜 그러네요? 하지만 요즘 나타난 표현을 보면 형용사와 동사의 경계가 없고 또 구분방법도 힘들어졌다. 온갖 대중매체들, 특히 지상파와 종편들은 언어의 무경계와 혼돈에 앞장서 마지않는다. 예를 들면, "아름답다"는 분명 형용사이지만 동사의 어미를 붙여 "아름답자"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아름답게 살자, 죽자, 입자, 먹자, 놀자, 사랑하자."를 총망라하는 뜻인가? 좋게 보면, 감성에 호소하는 효과는 더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언어의 역할은 그게 다가 아니다. "아름답자"는 형용사라고 해야 할지 동사로 봐야 할지 모르겠다. .. 2015. 10. 11.
끄읕~! 소화불량 주간이 돌아왔다. 아들도 나도 기름질 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서 튀김류는 장만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컴퓨터 게임을 하는 아들의 뒤통수를 바라보자니 뭔가 명절 냄새나는 음식을 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별수 없이 새우와 오징어 튀김을 딱 열 개씩 하였다. 아들은 좋아하.. 2015. 9. 28.
내가 먼저 #1. 쇼핑몰이다. 나는 막 밖으로 나가려는 중이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한 젊은 엄마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온다. 임신 마지막 달이라 해도 믿길 만큼 막강 몸통을 가진 엄마다. 7~8세 되어 보이는 딸과 5~6세 되어 보이는 아들의 손을 양옆으로 날개처럼 잡고 있다. 엄마는 자신을 기.. 2015. 9. 18.
똥 땄떠? 옵빠, 나 똥 땄떠, 떨따똥 땄떠. ( 번역: 오빠, 나 똥 쌌어, 설사똥 쌌어) T.V. 속에서 어여쁜 처녀가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어리광부리는 말이었다. 심지어 광고에도 이런 말투가 나왔다. 나는 진심으로 깊이 놀랐다. 남자들이 베이글女를 좋아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베이비 페이스가 아니라 .. 2015. 8. 10.
볶는 이야기 뭔가를 볶고 끓여 먹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되도록 불 앞에 서 있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그렇다. 냉장고 야채박스 속 채소들은 생으로 먹는 것들 위주긴 하지만 반드시 조리해야 하는, 예를 들면 호박이나 가지 등은 물러져 버린 적이 많았다. 가지가 며칠째 방치되어 있다. 며칠 전 6개.. 2015. 7. 30.
침투기 #1 자고 나면 뉴스에서 메르스 관련 숫자를 상향 조정한다. 이제는 질려서 알고 싶지도 않지만, 알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이 도시에 슈퍼전파자 후보가 나왔다는 소식 이후 거리에는 마스크 쓴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어제는 그 귀하다는 N95 마스크를 쓴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느리게 지.. 2015. 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