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145 봄밤 학부모 간담회는 작년과 달리 저녁 7시였다. 일하는 부모들을 위한 배려다. 굳이 서두르지 않았던 덕에 30분쯤 늦게 간다. 교장의 인사말과 학교소개는 건너뛰고 싶었다. 자화자찬을 듣는 일은 작년으로 충분하다. 늦게 들어간 강당은 의외로 썰렁하고 참석율은 저조하다. 유인물을 받아들고 뒷자리에 .. 2008. 3. 23. 군기가 바짝! 차려엇! 충성! 우중충한 오후, 잠시 킬킬 웃습니다. 사실 말이지 나를 웃게 하는 건 아주 사소한 것들이더군요. 가령 벌어진 부엉이 날개 속의 의외성이라든지 겁먹은 깜장 눈이라든지 금강제화 구두보다 엄청 편한 9800원짜리 구두라든가 진지한 순간 날려주는 아들넘의 참한 방귀 한 방이라든지 대신 .. 2008. 3. 18. 나, 포인세티아. 2003년 늦가을에 화분을 하나 샀었다. 살 땐 분명 포인세티아였다. 빨강 잎을 달고 있었으니까. 꽃, 식물, 화분 이런 고상한 것에 상당히 무식한 편이라 포인세티아 빨강 잎은 늘 빨강 잎으로 다시 돋아나는 줄 알았다. 시간이 흐르자 잎들은 마디에서 똑똑 떨어져 나갔다. 처음엔 그게 시들어 죽어가는 .. 2008. 3. 13. 거기가 어딘가 봄, 야금야금 온다. 오늘도 등 뒤에서 하루만큼 왔다. 무궁화 꽃이 피듯 등 뒤에서. 떠나가고 싶다. 봄바람 난다. 붙잡는 옷자락은 웃으며 뿌리칠란다. 돌아서는 건 자신 있다. 돌아선 후 뒤돌아보지 않을 자신도 있다. 자신 없는 건 돌아서기까지다. 2008. 2. 20. 한복 백설표 식용유 냄새와 함께 설이 지나갔다. 집집마다에서 선물세트 포장지와 재활용품과 스티로폼과 음식물 쓰레기들이 밀려 나왔다. 명절이 쓰레기로 증명된다. 아니다, 명절은 돈으로 증명되나? 명절 특유의 들뜨고 신나는 기류가 골목에서 사라진 지는 오래이다. 아이들 옷이나 신발, 즉 설빔은 굳.. 2008. 2. 11. 눈과 같이 여적지 은행잎이 살아있다. 밤이면 검은 나무 빛나는 잎으로 살아있다. 북쪽 어딘가에선 성급한 눈이 내린다는데. 시를 읽으면 나도 시인이 되고, 소설을 읽으면 나도 소설가가 된다. 즐거운 멀티를 위해 나는 쓰기보다 읽기를 택한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행복할 자신은 없다. 시인이 되려면 송곳이 .. 2007. 12. 15. 옥수수 스프는 내가 먹었다. 아침 일찍 인스턴트 옥수수 스프를 묽게 끓인다. 먹기 좋게 식혀 보온병에 담는다. 가는 길에 생수도 한 병 산다. 대학병원 소화기 내과 접수 창구에 진료 예약증을 디밀고 돌아서니먼저 와 앉아 있던 아부지가 나를 부른다. 야아야. 어, 아부지. 언제 오셨어요. 9시 15분쯤 도착했다. 아침 금식해서 아부지 힘 없지요? 아니다, 니도 일찍 집 나서느라 힘들었제. 위내시경을 예약한 날 오전 9시 40분. 아부지와 나는 병원 대기실 의자에서 만난다. 한 끼 굶은 아부지는 얼굴이 홀쭉하다. 살살 걸으시는 모양이 큰 환자 같다. 고작 胃 정기 검진이면서, 엄살 백단, 뻥쟁이 아부지다. 배 고픈 거 못 견디시던 호들갑은 엄마 손에 밥 드실 때의 어리광이었다. 그때가 봄날이었음을 아부지는 이제 아실까... 차례가 되어.. 2007. 12. 7. 머니머니 해도 주말에 친정 다녀온 월요일 아침, 몸이 천근이다. 날씨는 흐리고 혹 가을비라도 올지 모르겠다. 엄마 빤스를 두 꾸러미, 20개 사다 드렸다. 할머니용 하얀 속옷은 이제 도매 시장에나 가야 산다. 사이즈는 100. 그래도 허리 고무줄이 조인다 하셨다. 토요일 밤 가자마자 꼴깍 자고 일요일 겨우 한나절 엄.. 2007. 11. 5. 잃은 것과 얻은 것 1. 잃은 것. 많다. 말도 하기 싫을 만큼 많다. 긴 세월 많은 것을 허공을 향해 내던졌다. 종류도 다양하다. 대체로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돈으로 다시 살 수 있는 것과 살 수 없는 것. 혹은 물질과 정신의 것. 혹은 가시적인 것과 안 보이지만 더 힘센 것. 기간을 정할 순 없다. 굳이 거론하자면 .. 2007. 10. 15. 이전 1 ··· 12 13 14 15 16 1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