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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詩31

벽장 속의 연서ㅡ서대경 벽장 속의 연서 서대경 요 며칠 인적 드문 날들 계속 되었습니다. 골목은 고요하고 한없이 맑고 찬 갈림길이 이리저리 패여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걷다가 지치면 문득 서서 당신의 침묵을 듣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내게 남긴 유일한 흔적입니다. 병을 앓고 난 뒤의 무한한 시야, 이마가.. 2013. 11. 18.
그래서 강으로ㅡ 황인숙 '강' 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그래서 시인이 시키는 대로 갔다, 강으로.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하지 않기 위해 강으로 갔다. 인생이 얼.. 2013. 6. 18.
새벽편지 ㅡ정호승 새벽편지 ㅡ정호승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2013. 4. 21.
당신이라는 간이역 ㅡ 이미란 당신이라는 간이역 -이미란 나는 추억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늘도 인연이라는 완행열차를 타고 당신이라는 간이역을 찾아간다 시간이 지나가는 길목엔 처음 같은 두려운 풍경이 기다린다 어느 날은 대낮의 플랫폼에서 아직은 낯선 당신 얼굴을 떠올리기도 하고 어느 날은 어두운 대합실.. 2013. 4. 21.
고은 <그 꽃> 그 꽃 ㅡ고 은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2013. 1. 23.
이 생진 바다를 본다 바다를 본다 이생진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성산포에서는 한 마리의 소도 빼놓지 않고 바다를 본다 한 마리의 들쥐가 구멍을 .. 2012. 8. 14.
이 외수 <저무는 바다를 머리맡에 걸어두고> 저무는 바다를 머리맡에 걸어두고 -이외수 살아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인연은 노래가 되고 어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번씩 바다는 저물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흐리게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을 감싸안으며 나즈막히 .. 2012. 8. 14.
심재휘의 그 빵집 우미당 그 빵집 우미당 심재휘 나는 왜 어느덧 파리바케트의 푸른 문을 열고 있는가. 봄날의 유리문이여 그러면 언제나 삐이걱 하며 대답하는 슬픈 이름이여. 도넛 위에 쏟아지는 초콜릿 시럽처럼 막 익은 달콤한 저녁이 내 얼굴에 온통 묻어도 나는 이제 더 이상 달지가 않구나. 그러니까 그 옛날 강릉 우미당을 나와 곧장 파리바케트로 걸어 왔던 것은 아닌데, 젊어질 수도 없고 늙을 수도 없는 나이 마흔 살, 단팥빵을 고르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 이제는 그 빵집 우미당, 세상에서 가장 향긋한 아침의 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네.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것은 이미 이별한 것. 오늘이 나에게 파리바게트 푸른 문을 열어 보이네. 바게트를 고르는 손이 바게트네. 그러면 식탁에서는 오직 마른 바게트, 하지만 씹을수록 입 안에 고이는,.. 2012. 8. 14.
나희덕 푸른 밤 푸른 밤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 2012. 8.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