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詩31 소금창고 ㅡ 이문재 소금 창고 ㅡ이문재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 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이문재 (1959~) 시집 "제국호텔" 수록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가뭄 끝에 비가 겨우 한 모금 내렸다. 골목길 먼지도 주저앉히지 못했다. 도로변에는 여.. 2017. 6. 7. 한해의 마지막엔 詩 눈 김수영 눈이 온 뒤에도 또 눈이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린다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김수영 (1021~1968): 굳이 소개가 필요치 않은 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015. 12. 26. 너무 아픈 사랑 ㅡ 류근 너무 아픈 사랑 류 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 없는 것 다만 사랑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류근(1966~) 경북 문경 출생. 2010년 시집 (문학과 지성사 펴냄) ㅡㅡㅡㅡㅡㅡ.. 2015. 9. 22. 안현미, <사랑도 없이> 사랑도 없이 ㅡ 안현미 1. 반투명의 창문 같은 19세기 해양지도를 들여다본다고 했다 패, 경, 옥, 겁, 붕, 만 이런 글자들을 읊조린다고도 했다 네 그림자는 네가 가진 새장 같은 거라 했다 누구나 제 그림자 하나쯤은 지닌 채 울먹이다 간다 했다, 生 2. 흑, 흑, 흑 야근해,가 아니라 야해, 라.. 2015. 7. 1. <발작하는 구름> 김은경 <발작하는 구름> ㅡ김은경 저녁 일곱시가 좋아, 천변에서의 줄넘기는 약간 무거워진 구름 싫어도 돌아오는 새들 핸드백 속 무지개 폭죽들 휘파람을 불지 않아도 좋아 같은 오늘이 흘러간 걸 머리 위로 힘차게 넘길 수 없는 게 없어 비가 새는 얼굴들도 가뿐한 연기 같은 거였지 내가 .. 2015. 3. 9. 유병록 <구겨지고 나서야> 구겨지고 나서야 유병록 바람에 떠밀려 굴러다니던 종이가 멈춰선다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세계의 비밀을 누설하리라 다짐하던 때를 떠올렸을까 검은 뼈가 자라듯 글자가 새겨지던 순간이 어른거렸을까 뼈를 부러뜨리던 완력이 기억났을까 구겨지고 나서야 처음으로 허공.. 2014. 3. 26.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ㅡ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ㅡ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 2014. 1. 10. 공백이 뚜렷하다 - 문인수 공백이 뚜렷하다 문인수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붙인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 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사방 벽이 거짓말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주일이, 한달이 헐어놓기만 .. 2013. 12. 9.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ㅡ허 연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ㅡ허 연 굳은 채 남겨져 있는 살이 있다. 상스러웠다는 흔적. 살기 위해 모양을 포기한 곳. 유독 몸의 몇 군데 지나치게 상스러운 부분이 있다. 먹고 살려고 상스러워졌던 곳. 포기도 못했고 가꾸지도 못한 곳이 있다. 몸의 몇 군데 흉터라면 차라리 지나간 일이.. 2013. 11. 18.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