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기55 그해 겨울은 무지 따뜻했네 눈 한 번 푸짐히 오지 않는 야속한 겨울은 해마다 겪지만 올해는 유난히 따뜻한 날이 많았어요. 겨울이 온 건지 덜 온 건지 가늠도 안 되더라구요. 급기야 그저께 입춘이 도래했다네요. 2월로 접어드니 드디어 시절이 되었다는 거지요. 봄은 달력으로부터 다가와 턱을 괴고 있어요. 2월은 .. 2007. 2. 6. 꿀맛 오늘은 꼭 장을 봐야지 벼른 지 일 주일 되었다. 막상 저녁무렵 시장 갈 시간이 되면 딱이 사야 할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 하는 진행표가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살 것이 없는 것이다. 감자는 그저 감자, 호박은 그저 호박이다. 감자가 감자조림으로, 호박이 나물이나 부침개로 떠오르지 않으니, 낙제 주부이다. 내가 낙제 주부인 것은 아들 외엔 잘 모르는 비밀이다. 집에 있는 대로 먹자, 먹는 게 무어 그리 대수라고, 중얼거리며 오늘도 시장을 포기했다. 냉장고에 뭐가 있나? ( 아래위 뒤적뒤적) 돼지고기가 있다. 볶자. 그런데 양파바구니가 비었고 당근도 없다. (왜 시장에 가면 이런 사야 할 것이 생각 안 나는지, 이젠 알고 싶지도 않다) 넣을 채소라곤 애호박과 파 한 줄기가 다다. 양파 없.. 2006. 12. 2.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아침 6시 50분에 휴대폰 사자울음 알람이 웁니다. 사자가 아침마다 머리맡에서 그르릉 표효하면 끙하고 일어나 욕실로 갑니다. 거울속의 내 얼굴은 밤 사이 젊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깨어 어제밤 감은 머리를 오늘 아침 다시 감고 학교로 갑니다. 인사말과 함께 현관문이 닫히면 문 뒤에 대기하고 있던 고요가 찾아옵니다. 어제와 같습니다. 세탁기를 돌리려고 빨랫감을 분류합니다. 아들넘은 꼭 양말을 홀딱 뒤집어 벗어둡니다. 발바닥에 닿는 부분이 더 깨끗해야 하니 일부러 그렇게 한다네요. 문제는 그걸 듣는 에미가 킬킬 웃고 만다는 겁니다. 바로 벗는 사람 있듯이 뒤집어 벗는 사람도 있겠지요. 나중에 며느리에게 잘못 키웠다고 한소리 들을 게 뻔한 일이지만 그런 것으로 아이와 다투진 않습니다. 숫놈 냄새가 배인 아이.. 2006. 9. 15. 일인칭과 일인칭 #1. 愛야가 그녀를 보다. "내가 중 2년이었을 때 말이야..." 그녀는 부드러운 손동작으로 앞 머리카락을 뒤쪽으로 쓰다듬듯 쓸어 올린다. 이마엔 쓸어올릴 머리카락도 내려와 있지 않다. 언제나 단정히 앞머리를 모두 뒤로 넘겨 빗은 지 오래 되었다. 단지 저 동작은 진지하거나 지나간 추억을 말할 때 나타나는, 그녀 자신도 모르는 그녀의 버릇이다. "우리 아버지는 나더러 중학교 졸업하면 공장 가서 돈을 벌라 하셨어. 가난한 형편에 언니는 몰라도 나까지 고등학교 못 보내주신다네.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이게 다가 아닐 것이다, 하느님이 내 앞에 무엇가 다른 것을 주셨을 것이다. 지금 이리 가난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그녀는 지금 인정받는 국어 교사이니 하느님이 그녀를 위해 남.. 2006. 8. 20. 어젯밤 안개 봄이 끝났다고, 곧 여름이라고 한 지가 한 달이 지났어. 장마는 소강상태고 무더위도 아직은 달려들지 않네. 어제는 종일 안개가 뿌옇게 시가지를 덮고 있었어. 낮에 해가 쨍쨍하다고 말끔히 안개가 걷히는 게 아니데. 시내에서 올려다 본 먼 산이 뿌옇고 산에서 내려다 본 시내도 뿌옇기.. 2006. 6. 29. 징검다리 삼분의 이 건너 갔네. 행여 헛디딜까 발 밑만 보고 가네. 필요한 것은 내 발만한 면적, 넓은 지구 다 소용없네. 발바닥 몇십 배의 돌팍 위에서도 우린 불안하네. 가령 떨어질까 불안하네. 불안을 달래느라 등이 꼿꼿하네. 마음도 꼿꼿하네. 어지러워.... 흐르는 무엇은 언제나 어지러워. 저 .. 2006. 6. 13. 숨은 출세 지난 늦가을, 저 산세베리아 화분을 사서 안고 밤거리를 지나 집으로 왔습니다. 바람이 유난히 불어 더 쓸쓸한 가을밤이었습니다. 가끔 물을 주었습니다. 가끔 햇빛을 주었습니다. 초록잎에 먼지가 도드라져도 애틋이 닦아주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가고, 꽃들로 요란 떨던 봄도 지났습니다. 오랜만에 물을 주륵 붓던 내 손이 화들짝 놀라 멈추었습니다. 새 촉이 나와 있었습니다. 화분 뒷쪽 편으로 숨어 외로이 솟고 있었습니다. 만난 지 7개월 만의 경이로운 出世입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새끼를 치기 마련이고, 무릇 새끼란 다 기특하고 애닯습니다. 당연한 순리 앞에 제 탄복이 호들갑이라 해도 서운하지 않습니다만 겨우 세 개의 화분을 가진 사람으로선 황홀할 노릇입니다. 곁가지로 난다는 것. 튼실한 根本에 기대어 곁가지로 .. 2006. 6. 11. 아닙니다. 하느님. 그게 아닙니다. 눈물이 자꼬 나도 모르게 흘러나와, 뜻도 모르게 흘러나와 혹 우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랍니다. 잘 아시지요? 2006. 5. 23. 진통제 그렇다, 낭만이다. 들이대듯이, 낭만이다. 낭만이라 하니 너무 치기스러운가. 맞다. 낭만은 얼핏 유치한 모양새다. 만약 그것 때문에 "나는 낭만적이다"라는 고백을 망설인다면 이미 당신은 낭만적이지 않다. 젊은 시절의 나라면 아마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하였음에 분명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말장난이 뻔하고 피곤하다. 낭만은 그저 낭만이다. 거창할 것도 유치할 것도 없다. 돌아눕고 또 돌아눕는 번민도 낭만이다. 해질녘 어디론가 하염없이 떠나고 싶은 허망함도 낭만이다. 잠시 땅을 굽어보며 걷는 쓸쓸한 심정도 낭만이다. 아들과 돼지국밥을 먹으며 엄마의 츠자적 연애담을 해 주는 것도 낭만이다. 새벽 3시 30분부터 같은 노래를 5시간쯤을 꼼짝않고 들으니 세상이 밝아 있더라. 그것이 낭만이 아니었다면 가능할까. 낭만.. 2006. 2. 13. 이전 1 ··· 3 4 5 6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