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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産 위로 #1 몇 날 며칠 비가 내린다. 비 오는 날씨를 싫어하진 않았는데, 곧 싫어질 것 같다. #2 장마로 집에 갇혀서 본의 아니게 여기저기 정리를 한다. 오늘은 화장대 속옷 칸을 정리했다. 입었던 기억조차 까마득한 내복과 올인원과 자수 요란한 언더웨어가 아직 있었다. 매끄러운 속치마도 몇 개나 나왔다. 다 버렸다. 이젠 이따위가 필요 없단다. 몇 년 전에는 버리지 않았던 비싼 가방과 옷도 몇 년 지나니 버리게 된다. 마흔에 버리지 못했던 것을 쉰에는 미련 없이 버리고, 쉰에 버리지 않았던 것을 쉰다섯 넘어서는 버렸다. 나는 늘 혹시나를 보관하였다. #3 졸렬하고 비생산적인 정치인들 입씨름에 기가 막힌다. 정치판은 우물인가, 거기만 들어가면 개구리가 되어 그 명석한 대갈통들도 소용이 없다. 일본이 한국을 드러.. 2019. 7. 28.
복수와 내조 사이 늦은 저녁을 먹고 공원으로 간다. 남 보기에는 운동으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나에겐 하루의 중요한 마침표다. 산책을 이미 마친 듯한 운동복 차림의 노부부가 공원 쪽에서 마주 걸어온다. 두 분 다 족히 임신 7개월 배와 땅딸한 체구를 가졌다. 할아버지가 앞서고 할머니는 두어 걸음 뒤다. 할아버지가 팥빙수 가게 앞에 멈추어 넓은 유리창 안을 들여다본다. 그러더니 몇 걸음 뒤의 할머니를 돌아보며 제안한다. "우리 하나 시켜서 갈라 묵으까?" 할머니 0.5초 단칼에 답한다. "나는 단것 안 좋아한다." (포스 대단하심) 여전히 팥빙수 창 앞을 떠나지 못하지만 할아버지는 두 번 조르지 않는다. 덤덤한 표정의 할머니는 팥빙수 가게 안을 일별도 않고 전방주시, 가던 길 간다. 그들을 스쳐 지나며 웃음을 참는다. 하나 시.. 2019. 6. 5.
잃은 것의 무게 꽃들이 각자의 색으로 정신없이 핀다. 프렌치 라벤더, 샤스타 데이지, 함박꽃 같은 장미, 나무도 그늘을 넓히며 짙어간다. 여름으로 가는 봄. 작년에 바이러스 감염되어 내다버린 사진파일이 가끔 아깝고 아쉽다. 내가 성급했나 후회도 된다. 컴퓨터 병원에 가 볼 걸, 무슨 방책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물론 객관적으로 수준 있는 사진이라서가 아니다. 그저 내가 꺼내보는 용도일 뿐. 우연히 옛날 포스팅에서 발견한 사진. 2009년 가을, 혼자 경주 불국사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경주월드를 지나며 하늘을 문득 보니 나를 따라오던 열기구. 흔들리는 시내버스에 지친 영혼으로 앉았던 나는 그 와중에 사진을 찍었다. 이제 원본은 사라지고 저 작은 흑백처리된 것이 남았다. 사진은 추억으로 건너가는 실마리임이 분명한데,.. 2019. 5. 20.
봄날의 부스러記 13 2019. 4. 15 왼쪽 팔꿈치 근처가 시큰거리며 아픈 지 몇 달 되었다. 옛날 같으면 벼락처럼 병원으로 달려갔을 테지만 요즘의 나는 병에 대범하다. 음, 아플 때 되니 아프구나, 몸이란 어찌 이리 알람 같은지..... 그런데 어제는 제법 욱신거리길래 그만 미련을 접고 오늘 단골 정형외과로 갔다. 관절이 노쇠하여 그러려니 늑장을 부렸던 것인데, 사진을 찍어보니 관절 아닌 인대에 염증이 생겨 부었단다. 어쩐지 가벼운 컵이라도 들어올리면 통증이 오곤 했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인대. 약 1주일 치를 받고 주사나 물리치료 없이 돌아왔다. 원인을 알았으니 곧 낫겠지. 왼쪽 팔을 심하게 쓴 일도 없는데 왜 인대에 탈이 났을까? 2019. 4. 17 k에게서 거의 3년 만에 연락이 왔다. 한가한 내가 전화해야지 .. 2019. 5. 15.
어디쯤 #1 무기력하고 또 무기력하다. 시간을 보람없이 흘려보내는 일이 죄 같다. 날마다 해가 지면 죄책감에 한숨을 쉰다. #2 세상은 봄이라는데 나는 걷기를 한겨울보다 자주 빠진다. 바람이 불면 바람에 기대고 비가 오면 비에 기대어 나를 집에 가두었다. 며칠 전, 우연히 친구 따라 만보기 앱을 휴대폰에 깔았다. 몇 걸음 걸었나 확인해 보는 재미가 의외로 제법이다. 뜻밖의 유치한 동기부여. 어제는 6233보, 그제는 오전에 비 와서 2664보. 집을 나서면 기분 좋게 걷곤 한다. 문제는 집을 나서는 것이 가장 힘들다. #3 돌아가고 싶진 않아도 그리운 것들. 2019. 4. 12.
봄바람 양파 봄이 되니 양파가 난리다. 한 두개 아니고 죄다 싹이 올랐다. 심지어 껍질 벗겨 반으로 잘라 둔 양파에서 푸른 심지가 자라 나오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쯤되면 밭으로 가야 하나.... 주인 아지매는 저 푸른 싹 잘라서 실파인 척 쓰고 있다. 2019. 3. 16.
나 모르게 목련 필 무렵이 되었다고는 생각도 못했네. 며칠 전 어느 집 담장 너머에 흰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놀랐지. 골목길에 저렇게 피었다면, 햇빛 바른 공원에서는 벌써 다 피었다 졌을 텐데. 다음날 공원 목련 스트리트에 갔더니, 아이구 그렇더라. 아름다운 흰꽃은 꿈처럼 피었다가 다 졌더라. 몇 남은 어린 나무의 꽃과 늦된 몇 송이뿐이더라. 그러나 그뿐이지. 해마다 목련이 피면 겨울이 끝났음을 비로소 확인하곤 해. 2019. 3. 15.
부스러記 12, 훗날에도 기억날까 2019. 2. 28. 목. 2달에 걸친 아들의 연수가 끝나는 날이다. 오후 늦게 아들에게서 카톡이 왔다. "서울 발령." 아니 바로 서울? 어떻게, 어떻게 하지? 수습 몇 개월은 연고지에서 근무할 줄 알았는데, 그래서 당장 떠나는 건 아닐 거라 여겼다. 왈칵 울음이 났다. 눈부신 햇살 님에게는 울지 말라고 해 놓고 나는 울었다. 그것도 많이, 큰 소리로. ktx로 아들이 집에 도착하기 전에 다 울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짐 꾸릴 걱정만 하는 척했다. 2019. 3. 2. 토. 밤늦게 셔츠 다림질을 하고, 아이와 함께 캐리어를 꾸렸다. 슈트 2벌과 셔츠 여러 벌, 세면도구, 기타 등등을 넣었을 뿐인데 큰 캐리어가 꽉 차서 너무 무겁다. 나머지 필요한 것은 가서 사라고 신용카드 한 장을 주었다. 아직 녀석에.. 2019. 3. 11.
늘 그랬듯 확실히 계절에 무심해졌다. 계절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렇다. 감정의 경계는 선명함이 무너지고, 펑퍼짐 낮다. 질색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좋은 것도 없는 일상이란 얼마나 무채색인지. 오랜만에 나간 한낮의 공원에는 봄의 시간표대로 매화가 피어나고 있었다. 등을 대고 한 마리 흰나비처럼, 혹은 애처롭고 수줍게. 새로운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참으로 다행한 풍경이 아닌가. '수양매화나무' 한 그루에서는 두가지 색의 꽃이 피고 있었다. 접붙이기 하였는지, 원줄기에서는 흰 꽃이, 옆으로 뻗어 나간 가지에선 분홍 꽃이 피었다. '수양매화나무'는 희귀식물이라고 팻말을 붙여 놓았다. 하지만 몇 그루 중에서 유독 한 나무만 그런 걸 보니, 그것이 희귀의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문 앞 매화나무에 사람들이 발을 멈추고 .. 2019. 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