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759 잊은 시간 얼마 전, 티스토리 블로그의 홈화면이 새로 바뀌었다.(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좋으련만, 효율적으로 바뀌지도 않았다.)휴대폰으로 연 내 블로그 첫 화면에 '인기글'이라고 주욱 떠 있었다.바뀌기 전에도 있던 통계 메뉴지만 굳이 전면으로 새로 배치되어 보기만 산만해졌다.옛날 글일수록 조회 1회가 대부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글은 '인기글' 반열에 올라 있었다.'인기'라는 단어의 뜻이 나 모르게 변했나 보다. 어느날, 그 인기글 아닌 인기글 목록에 '막걸리를 위하여'라는 제목이 보였다.20여 년 블로그 글을 올렸지만 나는 제목을 보면 어떤 내용을 썼었는지 대강 떠오르곤 한다.그런데 '막걸리를 위하여'는 생전 처음 보는 제목이었다.더구나 배부른 막걸리를 좋아하지도 않는 주제에 내가 저런 글을 썼다고? 전혀.. 2024. 11. 6. 흘러가자 뒷베란다의 창으로 선선한 바람 한 줄기가 들어온 날이었어. 양파를 가지러 간 참이었지. 바람이 얼굴과 머리카락을 스치는 순간 멈칫했어. 와, 드디어 가을이 왔구나, 바람이 가벼워졌네. 나는 양파를 한 알 든 채로 창가에 서서 다음 바람을 기다렸지. 이미 9월이었거든. 하지만 나의 성급한 판단이었어. 그다음 바람은 없었어. 여러 번 말했다시피, 계절과 계절 사이에는 비가 있지. 바람이 아닌 비. 이 비 그치면 봄이, 가을이, 겨울이 올 것이라고 시인들도 다정하게 알려주었어. 비가 온다고 반드시 계절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계절이 바뀔 때는 반드시 비가 있지. 수학시간에 배운, 명제가 성립할 필요과 충분조건처럼 말이야. 결국 비가 왔어. 그동안 비다운 비가 내리지 않아 뜨거운 세상을 식히지 못했지. 밀렸.. 2024. 10. 12. 폭염이니까 그래 #1매일 찌는 듯이 더웠다.더위를 유독 타는 나는 집에 숨어있다가 해가 지면 슬금슬금 마트에 가거나 산책을 했다.잘하면 후천적 드라큘라도 될 수 있겠다.그러나 낮에 봐야 하는 볼일도 있어서, 이를테면 오늘처럼 은행에 가려면 되도록 이른 아침에 나가곤 했다. 골목길 내 앞에 자그마한 할아버지가 가고 있다.시장에 가시는 듯 가정용 카트를 돌돌 끌고, 아니 그런데 저것은 양산...?서울도 아니고 신세대도 아니고, 이른바 '경상도 남자'로 평생 살아오셨을 저 노인이 여성용 양산을 쓰고 있었다.짙은 네이비 바탕에 자잘한 무늬가 있는데, 꽃무늬인지 도형인지는 모르겠다.그러나, 폭염이니까 모든 것이 다 수긍되었다. #2매일 찌는 듯이 더웠다.횡단보도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곁의 아주머니는 연신 손수건으로.. 2024. 9. 20. 부스러記 35, 지배하는 여름 2024. 06. 26. 수요일 맑다. 저녁에 넷플릭스 영화를 보다가 끄고 운동을 나갔다.돌아와 다시 영화를 켜니 졸지에 로그인을 하라는 문구가 T.V. 화면에 뜬다.갑자기 로그인?나는 회원이 아니고 아들 계정에 실쩌기 숟가락 얻은 공유자이니 뭔 로그인?아들에게 구조요청을 하고, 아들의 이메일 주소와 비밀번호로 버벅대는 우여곡절 끝에 다시 화면이 열렸다. 얼마 전 넷플릭스가 주소지 다른 가족의 계정공유를 금지한다는 뉴스 이후로도 별다른 제재 없이 사이트가 열리기에 요금제에 따라 다르나 보다 하면서 잘 봐 왔다.그랬는데, 그저께 KT의 지니 셋톱박스를 새것으로 교체하였더니 넷플릭스도 제로베이스가 되어 다시 로그인이 필요했나 보다.그럼 아까까지 보았던 넷플릭스는 뭐란 말인고 이해가 안 되었지만, 깊이 알 수.. 2024. 8. 28. 부스러記 34, 지난 이야기 2024. 05. 16 목요일로즈마리를 다시 샀다.그것도 큰 폿트를 샀다. 지난번처럼 작은 것을 사서 키우느라 애가 타 아침마다 화분 앞에 쪼그려 앉는 짓 그만하고 싶다.이번에는 시들지 않게 물만 주면서, 곁을 지날 때도 무덤덤하게 휙 스쳐야겠다. 2024. 05. 24 금요일카메라 배터리 충전기를 찾느라 컴퓨터 테이블 왼쪽 서랍을 뒤적일 때였다.어, 이 봉투는 뭐지?무심코 열어보니 오올~, 신세계 상품권!무려 1만 원짜리 5장이다.작년에 휴대폰 요금제 변경을 했다고 통신사에서 보낸 것인데, 장 보러 갈 때 시나브로 사용하고 남아있었던 모양이다.거기 상품권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으니 이만하면 횡재에 속한다.계절 지난 옷 주머니에서 고작 오천 원을 발견해도 기분 째지는데 그 열 배가 아닌가.생.. 2024. 7. 31. 쓸데없는 추리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환기를 위해 한 뼘 열어둔 베란다 바깥창으로 차락차락 빗소리가 들어와 머리맡에 내내 머물렀다. 빗속에 누워 잠을 자는 듯했다. 커피를 들고 창에 붙어 서서 바깥을 본다.비스듬히 아래 이웃 빌라의 옥상에 빨래가 빗속에 있다.타월이 세 개, 팬티가 2개, 티셔츠 하나, 그리고 초록색 이태리 긴 타월이 비를 맞고 있다.어제도 비가 종일 오락가락했는데, 그렇다면 대체 저 빨래는 언제 해서 언제 넌 것일까.오늘이 아님은 분명하다, 내가 목격하는 지금은 새벽 5시니까.빨래의 주인은 그제나 그끄저께 빨래를 해서 널어두고 어딘가 멀리 떠났을 것이다.그 사람은 비 예보를 알지 못했거나 알았어도 믿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래야 저 풍경이 말이 된다.멀리 있는 그 사람은 거둬들이지 못한 자신의 빨래.. 2024. 7. 16. 주여, 때가 되었습니까? 날이 더워지니 밥맛이 슬슬 떨어진다. 계절 상관없이 따끈한 국과 찌개를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빈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이럴 때는 뭐다?글치, 열무물김치!정답을 알고 있지만, 나 먹자고 음식을 하기란 참 성가셔서 예년보다 그 시작이 늦었다.시작을 하면 여름 내내 지속되어야 하니, 지속 가능한 일을 시작할 때는 결심이 필요한 법이다. 싱싱한 열무 한 단을 샀다.다듬어 절여놓은 다음, 물김치 분량만큼 잡은 물에 밥 한 공기 넣어 폭폭 끓인다.열무물김치는 엄마가 하던 방식대로 고춧가루 없이 뽀얗게 하는데, 밀가루나 찹쌀가루 아닌 밥을 넣어 끓여 식힌 밥물이다.열무 외는 다 집에 있는 부재료도 손질했다.색을 더해 줄 당근과 양파 채 썰고, 매콤한 땡초 네댓 개 분질러 두고, 마늘 몇 쪽 편 썰고, 드디어 김치통에.. 2024. 6. 17. 부스러記 33, 그건 아니라고 해 줘 2024. 3. 25. 월. 비와 바람 의료대란으로 전국이 난리다.하필 이런 시기에 2개 科 진료가 예약되어 있는데, 병원으로부터 연기되었다는 안내가 없으니 예정대로 갔다.지방대학병원이라 그런지, 뉴스가 과장되었는지, 의외로 병원은 멀쩡하고 한산했다. 공복으로 아침 일찍 가서 피를 뽑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두어 시간 빈둥거렸다.담당 의사는 피검사 수치가 다 좋으니 지금대로만 유지하라고 했다.그런데 병원사정이 어찌 될지 모른다며 무려 6개월치 약을 처방해 주었다.오후에 만난 다른 科 의사 역시 6개월치를 주었다.하루에 먹는 약이 많다 보니 6개월치는 어마어마하였다.한 가마니의 약을 품고 비비람 뚫으며 집에 오니 무슨 대장정을 마친 기분이다.그날 저녁 뉴스에 내가 간 대학병원 교수들이 사직서를 냈다며 흰 가.. 2024. 5. 24. 가지가지 #1 바늘이 굵어서 조금 따끔하실 거예요, 간호사는 상냥하게 말했다. 네, 괜찮아요, 혈관이나 잘 나오면 좋겠어요. 오른쪽 팔에서 채혈 후 붙여둔 알코올 솜을 보더니 그녀는 왼팔을 선택했다. 혈관이 잠복해 있을 법한 곳을 톡톡 두드리며 탐색했지만 왼쪽 팔은 신통찮았다. 역시 오른팔이 좋군요. 그녀는 능숙하게 오른쪽 손목과 팔꿈치 사이 어디쯤에 바늘을 꽂았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따끔했다. 그렇게 CT촬영을 위한 조영제가 들어갈 채비를 끝냈다. #2 1년에 한 번 점검 차원에서 하는 CT촬영이다. 닫아두었던 주삿바늘 캡을 열자 조영제가 혈관으로 흘렀다. 우리의 피돌기는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순식간에 내 몸을 돌아 내려가나 보다. 조영제의 흐름은 선명한 뜨거움으로 감지되었다. 목 근처가 뜨겁더니 곧 가.. 2024. 4. 12. 이전 1 2 3 4 ··· 8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