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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記 32, 어쩌다 봄 2024. 1. 26. 금 오랜만에 부평동 깡통시장에 갈 일이 생겼다. 샴푸와 돋보기가 목적인데, 굳이 거기까지 가는 이유는 오늘 하루치 운동으로 퉁치려는 속셈이다. 집 여기저기 널려있는 돋보기를 코에 자국이 덜 생기는 가벼운 재질로 통일하고, 돋수도 한 단계 올려야 한다. 얼마 전, K-총수들을 배경 삼아 어묵먹방을 펼친 대통령 덕에 관광객들이 와글거리지 않을까 염려했으나, 매스컴을 탄 그 어묵가게 앞에만 몇몇 둘러서 있고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시장은 적당히 붐비고 적당히 한산했다. 깡통시장이나 국제시장에 갈 때는 마음에 '심드렁'을 장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물욕 많은 여자들에겐 자칫 개미지옥이 되기 십상이다. 돋보기를 먼저 사고 깡통시장 골목 세 개를 훑고 나니 쇼핑은 성공리에(!) 끝났.. 2024. 3. 12.
부스러記 31, 참 같은 거짓 2024. 1. 5. 금요일 새해 들어서서 닷새째 날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카톡이 울린다. 안경점, 치과, 전자랜드 등등이다. 그들의 용무는 해마다 한결같다. "愛야 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2024. 1. 25. 목요일 북극한파라고 전국이 꽁꽁 얼었다. 이 강추위에 나는 느닷없이 머리카락이 거슬린다. 지난 추석 무렵 아주 짧게 자른 후 그대로 방치하였더니 어느새 헬멧머리가 되었다. 패딩 후드에 닿는 무게가 싫어서 얼마 전 목덜미 부분을 셀프로 잘랐더니 동글뭉툭한 머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꽤 버티다가 전체적인 층을 주어야 해서, 오늘은 미용실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굳이 이런 날씨에...!) 우리 동네에는 작은 골목 미용실이 참 많다. 유행 따르는 젊은 여자들이 아닌 동네 아줌마들을 주.. 2024. 2. 8.
밥 짓다 아침밥을 지었다.아침에는 빵과 과일로 충분하기 때문에 밥을 지을 이유가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새해 첫날, 밥의 향기로 집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쿠쿠여사의 진행에 따라 칙칙폭폭 밥이 달려가는 동안, 나는 새해 첫 커피를 느긋하게 마셨다. 밥이 똑 떨어진 것은 사실 어제였다.어제 아침 역시 평소처럼 빵을 먹었으니 말하자면 저녁밥이 없었던 것이다.그렇다고 한 해의 마지막 저녁에 굳이 밥을 지어 이듬해로 묵은밥을 넘기기는 어쩐지 싫었다.한번에 5인분 정도의 양을 지어서 소분보관하기 때문이다.예전의 나였다면 날짜가 무슨 상관이냐며 똑같은 하루일 뿐이라고 했을 것이다.늙는 게야, 이런 것이 늙는 증거지.늙고 있는 나는 밥 대신 라면으로 12월 31일 한해의 마지막 저녁을 해결하였다. 굳세게 하루 버텨 드디어 오늘 .. 2024. 1. 1.
부스러記 30, 겨울준비 2023. 10. 11. 수.폐렴접종을 하였다, 잘 살아 보겠다고.마침내까지는 모르겠고, 당장 지금 이 겨울 잘 살아보겠다고 접종을 하고, 뻐근한 팔을 조심조심 모시며 몸을 누인다.   2023. 10. 16. 월친구와 통화를 하고 나니 한숨이 나왔다.안도와 걱정이 공존하는 한숨이다. 달랑 하나뿐인 친구와는 적어도 한 달에 두어 번은 전화를 하는 편인데, 한 달 넘도록 무소식은 드문 일이었다.추석이 지나도 전화가 없어서 명절 뒤 많이 바쁜가 아니면 몸살이 났나 했다.그랬는데, 추석 며칠 전에 친구의 남편이 쓰러져서 난리도 아닌 상황이었다.겨우 수술 후 남편을 중환자실에 두고 친구는 제정신이 아니라 했다.그럴 것이다.무엇으로도 그녀를 위로하거나 거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친구의 남편은 개.. 2023. 11. 28.
국수 혹독했던 여름을 지나는 동안 나를 굶어 죽지 않게 했던 건 국수였다. 해마다 여름을 유난하게 힘들어하였다. 땀을 남보다 더 흘리면서도 잘 먹어내지를 못하니 몇 배로 더 지쳤다. 뜨뜻한 밥알을 씹는 상상만으로 입맛이 저만치 달아나곤 했다. 그러나 웃기게도 아침에는 뜨거운 커피와 따뜻한 빵을 먹었다. 밥알의 논리대로라면 시원한 아이스커피로 오장육부를 식혀야 마땅한데, 커피는 일 년 내내 뜨거운 커피여야 했다. 모순의 이중인격자여, 결국 그냥 밥이 싫었다는 것뿐이구먼. 그럴 때, 세상에는 국수가 있었다. 순결한 흰 국수는 나를 거슬리지 않고 호로록 매끄럽게 목구멍을 넘어갔다. 때로는 차갑게 때로는 매콤하게 내 배를 벌떡 일으켜, 씩씩하게 저녁 운동을 나가게 했다. 바로 그 점이 해로운 식사라는 건강상식쯤 나도.. 2023. 10. 31.
부스러記 29, 살아 있음 2023. 7. 17. 월요일 오늘은 아들의 생일이다. 작년에는 부모님 입원과 간병으로 내가 친정에 가 있었기 때문에, 아들에게 약간의 생일 축하금만 보내고 말았다. 올해는 집에서 생일을 보내게 하고 싶은데, 생일인 오늘 휴가를 떠난다고 한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강원도 평창의 리조트를 예약하여 3박 4일로 간다고 했다. 전국이 비에 빠져 산사태며 침수사고로 난리법석인 터라, 운전해서 대관령 넘는 상상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예약을 취소했으면 해서 슬쩍 옆구리를 찔러보니, 비 이야기 좀 그만하란다. (나쁜 놈..!) 청개구리 아들 이기는 방법을 모르니 올해도 역시 생일 축하금을 보내며 휴가비에 보태 쓰라고 했다. 아들은 사양했지만, 집에서 생일상 차릴 비용만큼이니 피차 부담 없는 금액이었다. 자식.. 2023. 9. 22.
가을산 같은 #1 6월이 거의 끝나가던 어느 날, 카톡으로 누군가의 부고가 왔다. 부고의 주인공은 모르는 이름이었고 얼굴도 처음 보는 남자였다. 어, 이 사람이 누구지, 잘못 왔나? 중얼거리던 순간, 나는 머리를 때려 맞은 듯했다. 그의 이름에서 익숙한 닉네임을 유추해 낸 나는 잠시 멍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는 daum시절부터 오랜 블로그 친구였다. 어쩐지 최근 글을 올리지 않더라니, 어디가 아프셨나, 어디가 아프셨구나.... 그래도 그렇지, 이럴 수가. 나는 그를 알만한 지인들에게 카톡을 날려 진위를 확인하였다. 모두 부고를 받았고 마음 아파하는 중이었다. 다시 부고를 열어 그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한 번도 뵌 적 없었지만 짐작처럼 선하고 단정한 얼굴이었다. 그의 글과 같았다. #2 daum블로그에서 소통하던 이.. 2023. 8. 30.
취향저격 처음 본 넷플릭스 영화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아들 아이디에 숟가락 얹은 공유 프로필이라서, 뭘 보았는지 이력을 조회할 재주가 없다. 처음에는 주로 어워드 수상작에서 골랐는데, 올라온 영화들은 이미 보았거나 안 봐도 본 듯한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고를 영화가 많지 않으니 곧 관심이 멀어져서 한동안 넷플릭스를 잊었었다. 그러다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자 딱히 집에서 할 일이 없어 다시 띄엄띄엄 혹은 맹렬히 보기 시작했다. 나를 찾아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사랑이 지나간 자리, 그린북, 내 앞의 生, 와일드 라이프, 가재가 노래하는 곳, 파워 오버 도그, 아메리칸 세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단편영화를 뒤적거리던 어느날, 그동안 선택에서 제외하였던 외국 미니시리즈를 보았다. 미국 범.. 2023. 7. 25.
2년만의 해후 2년 전쯤에 마트 와인 코너에서 붉은 포도주를 한 병 샀었다.과일주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왜 샀는지 모르겠지만, 따지 않은 채 냉장고 아래칸에 내내 서 있었다.2년 동안 술을 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와인을 사고 얼마 되지 않았던 11월 초, 나는 간단한 암수술을 받았다.몇 개월 후 진료시간에 의사에게 물었다."와인 정도는 마셔도 되나요.?""1주일에 소주 한 잔 정도요.... 그런데 암세포도 함께 환호하겠죠?"아, 이건 마시지 말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이지.나는 사 둔 포도주 포함 세상의 모든 술을 마음에서 지워버렸다.진정한 술꾼이 아니었던 거야, 그런데 왜 포도주를 볼 때마다 쓸쓸하고 지랄일까. 생각해 보니, 오래전에 대학병원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받았을 때도 치과의자에 누운 채로 물었다.. 2023.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