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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그녀는 이른 아침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침 6시, 하늘은 이미 밝았지만 세상은 덜 깬 시간이었다. 습관대로 창을 열기 위해 베란다로 나갔을 때, 빌라 담너머 외진 골목에서 담배 피우는 그녀를 보았다. 창을 드르륵 연다면 그녀가 위를 볼 테지. 나는 창 열려던 손을 거두었다. 굳이 눈을 마주쳐서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방해하고 싶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녀가 나를 볼까 봐 몸을 숨겼다는 게 맞다. 그녀가 위의 나를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도 있건만, 어쩌면 나의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 푸석거리는 퍼머머리를 아무렇게나 묶고, 허름한 줄무늬 티셔츠와 반바지의 아줌마였다. 왼손 아귀에는 흰 종이를 구겨 둥글게 야구공처럼 쥐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사연 있어 보이게 했다. 그 외 겉으로 보.. 2021. 9. 12.
휴지가 물어다 준 나에게 8월은 해마다 고난의 달이었다. 올해도 예외는 없었다. 일상 중의 사고들이 몇 가지 일어났고, 땀만으로도 죽을 지경인 여름을 정말 힘들게 보냈다. (아직 다 보내진 않았네) 앞자리가 바뀌었던 몸무게가 아깝게 다시 원위치로 내려왔지만, 곧 가을이다. 들판이 익어가고 있고, 식욕이야 언제든 대기 중이니까. 태풍에 이어 질기고 격한 물폭탄 때문에 며칠 동안 세탁을 하지 못했다. 엊그제 금요일 밀린 옷가지 몇을 돌렸다. 반가운 해가 쨍한 베란다에 널려고 보니, 검은 바지에 눈이 하얗게 내려있다. 이기 머꼬, 방금 빨았...는데? 아.... 바지 호주머니에 휴지 두 장을 넣었던 기억이 난다. 얇은 여름용 천이라 호주머니 검사를 겉에서 만져보며 확인했던 것이 사단이었다. 부드러운 휴지 두 장의 부피감을 만져.. 2021. 8. 29.
부스러記 21, 쪼잔한 나날들 2021. 5. 5. 수 아침에 아들에게 딱 십만 원을 보냈다. 왜? 어린이날이니까. 내 어린이가 다소 늙은 것뿐. 늦은 오후에는 로즈마리 잔가지를 정리하였다. 그중 튼실해 보이는 8개를 골라 삽목, 번식을 시도하였다. 아무리 주인이 똥손이라도 부디 뿌리를 내려 살아줘잉~. 2021. 6. 7. 월 그렇게 부탁했건만 삽목한 로즈마리 가지는 거의 사망하고, 2개만 남았다. 그나마 모체처럼 싱싱하게 푸른색을 유지하는 것은 딱 하나다. 머잖아 그 하나만 남을 것 같다. 쳇, 아쉽지 않다. 푸르고 무성한 모체 화분이 상시 대기 중이니 또 시도하면 된다. 다만 아침마다 기색 살피던 나의 청승이 아깝다. 암만 생각해도 내가 낯설다. 아침에 눈뜨면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식물에게 인사하는 나의 노년. 2021. 6... 2021. 6. 27.
굴뚝 있던 하늘 우리 집 한 블럭 앞 골목에는 오래된 목욕탕 건물이 있다, 아니 있었다. 헬스까지 구색을 나름 갖춘 동네 사우나였다. 얼마 전 그 건물을 허물었는데, 긴 코로나 시대에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그리고 굴뚝만 남았다. 내가 본 굴뚝 중에 가장 높은 굴뚝이었다. 아주 오래 전 지어 올렸는지, 요즘 도시에 그렇게 높고 낡은 굴뚝은 쉽지 않았다. 거실에서 정통으로 바로 보이는 그 거대한 굴뚝은 내 몫의 하늘을 반으로 분할하였다. 가끔 구름이나 달을 찍으려고 해도 굴뚝의 존재는 어느 각도에서나 피할 수 없었다. 차라리 굴뚝을 살려서 마치 빈티지를 의도한 것처럼 찍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굴뚝은 어디까지나 부속품일 뿐, 이제 목욕탕이 사라졌으니 굴뚝 너도 곧 끝이얏! 나는 저 높은 굴뚝을 어떻게 허물지 너.. 2021. 5. 31.
노란 봄 황사가 바다를 증발시켰다.파랗게 반짝거려야 할 배경은 하얗게 날아갔고, 유채꽃만 풍경 속에서 살아남았다.그런데 유채밭에는 왜 항상 거름냄새가 옵션일까.어느 해 봄, 평화공원 귀퉁이에 손바닥만 한 유채밭이 처음 생겼을 때도 그랬다.유채꽃이 필 무렵에 자연친화적 퇴비를 줘라, 이런 공원관리 메뉴얼이라도 있을까.그러거나 말거나 봄은 꿋꿋하게 펄럭이며 전진한다.                                           ※ 덧붙임: 황사가 걷힌 며칠 후 같은 장소. 2021. 4. 19.
부스러기記 20, 그대의 콧바람 2021. 3. 31. 수요일 뜻한 바 있어 점심 무렵 집을 나섰다. 도시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석대 꽃단지에 가려는 것이다. 딱히 정한 목적은 없었지만, 온갖 꽃들이 쏟아져 나왔을 계절이 아닌가. 말하자면, 콧구녕 바람을 위한 구경 차원일 뿐이다. 이 도시에 살면서 그 유명한 석대 꽃단지에 처음 가보다니, 참으로 건조한 인생이었다. 길게 이어진 화원들 앞에는 찬란한 꽃들과 모종들이 장마당처럼 깔렸다. 사람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나는 꽃과 사람과 흥정 사이를 기웃거렸다. 구경으로 눈이 어지럽다가 아 참, 문득 전부터 갖고 싶던 나무가 떠올랐다. 꽃단지에 올 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비로소 행동목표가 생긴 셈이다. 나는 화분 가게에서 토분을 하나 산 후, 꽃집으로 가 작은 파키라를 골랐다. 꽃집 아.. 2021. 4. 14.
체중계 위에서 겨울은 탄수화물의 계절이다. 특히 이번 겨울은 더했다. 치과치료를 받느라 부드럽고 편한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니 상온이라도 차가운 과일이나 채소들은 내 치아를 더 힘들게 했다. 그렇다고 치아 시린 것을 피하기 위해 샐러드나 과일을 따끈하게 데워 먹을 순 없었다. 귤도 입에 물고 체온으로 잠시 데운 후 조심조심 씹곤 했다. 반면, 맛있는 탄수화물 폭탄은 겨울과 특히 어울렸다. 떡국, 만둣국, 떡만둣국, 칼국수, 김치국밥, 군고구마, 호박죽, 그리고 라.면. 도대체 TV에서는 왜 그토록 라면을 끓여대는지, 라면회사와 모종의 결탁이 있을 거라는 음모설을 조심스레 제기해 본다. 급기야 조인성까지 대게라면을 끓이고, 불행한 연인들도 툭하면 노랑냄비에 라면을 끓이며 불행을 소꿉장난으로 승화시켰다. 화면.. 2021. 3. 18.
들킴 오랜만에 따뜻하고 비도 그쳤습니다. 카메라를 챙겨 오후에 공원으로 갔습니다. 3월 들어 내내 바람 불고 춥고를 반복했건만 기특하게 목련이 피어나고 오래된 분홍동백도 그자리에서 여전합니다. 늙어서 그런지 조금 누추해졌군요. 공원에는 삼삼오오 노인들이 가득합니다. 한낮에 갈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래엔 더 할 것입니다. 열에 아홉은 어두운 패딩 재킷을 입었습니다. 컴컴한 그들의 무리가 너무 암담해 보여 홱 눈길을 돌렸습니다. 돌아오는 길 아파트 입구에서 젊은 부부와 세 살쯤의 꼬맹이 둘이 막 차에서 내립니다. 아이들은 혹시 내가 못 들을세라 목청 높혀 뒷통수에 대고 인사합니다. 함머니 안녕하세요오! 엄마가 황급히 아가들을 제지합니다. 야야, 우리 할머니 아니야~. 나는 무심하게 응, 그래, 안녕? 대답하며.. 2021. 3. 5.
잔소리 #1 베란다의 감자를 처리해야 했다. 이미 시들어 쪼글쪼글한데, 이러다 싹마저 나면 버릴 수밖에 없다. 시든 껍질은 물기를 잃어 칼날을 매끄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뭉텅뭉텅 두껍게 깎인다. 아깝다. 드러나는 속살은 초록색이다. 이를테면 감자의 탈을 쓴 키위. 빛을 많이 쬐면 초록 감자가 된다지만, 내 수준에서 짐작해 보면 그냥 추위에 파르라니 질린 게 아닐까. 뚬벙뚬벙 썰어 냄비에 담고 소금과 그린스위트를 한 스푼씩 넣어 삶는다. 조리의 과정은 그게 다다. 큼직한 반찬용 감자인데, 구입할 때는 감자채 볶음을 염두에 두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유효기간은 한참 지났다. 이제는 감자의 용도가 아니라 나의 용도대로 쓰기로 했다. 반찬용 감자지만 삶아 먹고 싶으니 그리 하는 것이다. 맛있는 냄새가 어느새 퍼진다.. 2021. 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