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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중계 위에서 겨울은 탄수화물의 계절이다. 특히 이번 겨울은 더했다. 치과치료를 받느라 부드럽고 편한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니 상온이라도 차가운 과일이나 채소들은 내 치아를 더 힘들게 했다. 그렇다고 치아 시린 것을 피하기 위해 샐러드나 과일을 따끈하게 데워 먹을 순 없었다. 귤도 입에 물고 체온으로 잠시 데운 후 조심조심 씹곤 했다. 반면, 맛있는 탄수화물 폭탄은 겨울과 특히 어울렸다. 떡국, 만둣국, 떡만둣국, 칼국수, 김치국밥, 군고구마, 호박죽, 그리고 라.면. 도대체 TV에서는 왜 그토록 라면을 끓여대는지, 라면회사와 모종의 결탁이 있을 거라는 음모설을 조심스레 제기해 본다. 급기야 조인성까지 대게라면을 끓이고, 불행한 연인들도 툭하면 노랑냄비에 라면을 끓이며 불행을 소꿉장난으로 승화시켰다. 화면.. 2021. 3. 18.
들킴 오랜만에 따뜻하고 비도 그쳤습니다. 카메라를 챙겨 오후에 공원으로 갔습니다. 3월 들어 내내 바람 불고 춥고를 반복했건만 기특하게 목련이 피어나고 오래된 분홍동백도 그자리에서 여전합니다. 늙어서 그런지 조금 누추해졌군요. 공원에는 삼삼오오 노인들이 가득합니다. 한낮에 갈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래엔 더 할 것입니다. 열에 아홉은 어두운 패딩 재킷을 입었습니다. 컴컴한 그들의 무리가 너무 암담해 보여 홱 눈길을 돌렸습니다. 돌아오는 길 아파트 입구에서 젊은 부부와 세 살쯤의 꼬맹이 둘이 막 차에서 내립니다. 아이들은 혹시 내가 못 들을세라 목청 높혀 뒷통수에 대고 인사합니다. 함머니 안녕하세요오! 엄마가 황급히 아가들을 제지합니다. 야야, 우리 할머니 아니야~. 나는 무심하게 응, 그래, 안녕? 대답하며.. 2021. 3. 5.
잔소리 #1 베란다의 감자를 처리해야 했다. 이미 시들어 쪼글쪼글한데, 이러다 싹마저 나면 버릴 수밖에 없다. 시든 껍질은 물기를 잃어 칼날을 매끄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뭉텅뭉텅 두껍게 깎인다. 아깝다. 드러나는 속살은 초록색이다. 이를테면 감자의 탈을 쓴 키위. 빛을 많이 쬐면 초록 감자가 된다지만, 내 수준에서 짐작해 보면 그냥 추위에 파르라니 질린 게 아닐까. 뚬벙뚬벙 썰어 냄비에 담고 소금과 그린스위트를 한 스푼씩 넣어 삶는다. 조리의 과정은 그게 다다. 큼직한 반찬용 감자인데, 구입할 때는 감자채 볶음을 염두에 두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유효기간은 한참 지났다. 이제는 감자의 용도가 아니라 나의 용도대로 쓰기로 했다. 반찬용 감자지만 삶아 먹고 싶으니 그리 하는 것이다. 맛있는 냄새가 어느새 퍼진다.. 2021. 2. 24.
향기를 위하여 #1 아침에 일어나면 미지근한 물부터 한 잔 가득 마신다. 밤새 말라있던 오장육부를 깨우기 위해서다. 아침 공복에 물 마시기를 습관으로 안착시키려고 노력 중인데 겨우 6개월 남짓 되었다. 여기까지는 꽤 모범적으로 보인다. 물 마시고 5분가량 지나면 커피물을 올린다. 그때 찰나의 갈등이 스친다. 커피를 큰 잔으로 배 부르게 마실까, 작은 잔으로 간에 기별만 줄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배 부르게'다. 건강인으로 거듭나려면 공복 물 마시기도 좋지만, 공복 커피부터 끊는 게 옳다. 하지만 나는 애초 그딴 훌륭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녹차를 마시자고 결심을 아무리 해도 커피 카페인, 특히 공복 카페인이 좋다. 그래서 먹다 남은 고급 녹차는 방향방습제로 전락하기 일쑤다. 호모 커피쿠스. #2 뻥튀기 한 봉지를 .. 2021. 1. 12.
마지막 부스러記19 2020. 12. 3. 목요일 제법 춥다. 최근에 사라진 듯하던 수능 추위가 올해는 찾아왔나 보다. 올해 수능 보는 아이들이 2002년 월드컵 출생이라고 한다. 왠지 모르지만, 더 미안하고 안쓰러워진다. 찬란한 기운에 좋은 일 있을 건가 싶어 세상에 나온 아이들을 이렇게 고생시켜서. 2020. 12. 5. 토요일 늦은 오후가 되면 작은 화분 네 개를 거실로 들여놓는다. 베란다에는 꽃기린 큰 화분 혼자 쓸쓸하다. 밤을 거실에서 지내고 아침 햇살이 퍼지면 작은 화분들을 다시 베란다로 내놓는다. 햇살이 들어오면 오전 내내 베란다가 마치 온실처럼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밤새 혼자 있던 큰 화분 곁에 작은 화분들을 나란히 놓으면 그때야 옹기종기 이뻐 보인다. 자, 반상회 타임이닷! 2020. 12. 8. 화요일 얼.. 2020. 12. 21.
모든 것은 자기 앞에서부터. #1 흐리고 하늘이 낮다. 이런 을씨년스러운 날씨에는 눈이 제격이련만, 절대 눈이 내릴 리 없는 이 도시. 틀어 둔 T.V.에는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코로나19와 역겨운 정치싸움이 가득하다. 날씨도 이리 꿀꿀한데 고만들 쫌 해! 속으로 버럭 소리를 지른 후 나는 뉴스를 떠나 오랜만에 넷플릭스로 들어간다. 그사이 새로운 컨텐츠가 제법 올라와 있다. 오오, 2020産 "자기 앞의 生". 더구나 소피아 로렌이 출연한다니 놀라웠다. 아마도 내 무의식에는 그 옛날 여배우가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마담 로사 역의 소피아 로렌을 보고 싶었다. 감독이 소피아 로렌의 아들이라지만 그렇다해도 출연 결심은 참으로 대단한 용기가 아닌가. 86세의 대배우, 주름지고 늘어진 피부, 여전히 긴 머리, .. 2020. 12. 11.
겨울 예고 아침 8시가 넘자 햇살이 거실로 들어온다.베란다에서 주방까지 낮고 길게 뻗는다.동쪽의 높은 건물을 비집고 오늘의 해가 당도했다는 신호다.나는 햇살이 미치지 않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아침햇살의 진군을 본다.해가 높아질수록 햇살이 조금씩 짧아지다가 거실 가운데로 올 때쯤, 커피가 고파진다.간혹 커피잔을 들고 그 햇살 속에 발을 쓰윽 담가보기도 한다.맨발이 창백한 시절이 되었구나, 그렇게  나의 하루가 온다. 갑자기 입동이다.지난 봄꽃과 끈적이던 여름과 미친 태풍이 믿어지지 않는다.무릇, 끝에 서서 뒤돌아보면 그 긴 세월이 무엇이었나 짧고 허망할 따름이다.       ※첫1회는 손수 클릭해야 음악이 실행됩니다.그 다음부터 죽 자동실행~.익스플로러와 크롬의 다른 점이네요. ㅠㅠ 2020. 11. 8.
부스러記 18, 가지가지 다 한다 2020. 9. 20. 일 아들에게 이번 추석은 내려오지 말라고 했다. 할아버지 뵈러 가지 않는 게 옳을 듯하고, 그렇다면 제사도 없는데 굳이 움직일 필요 없다고 했다. 아들은 글쎄, 흐릿하게 대답하더니, 내가 확실하게 오지 말라고 하니 받아들였다. 야호, 명절음식 따위 없이 평소처럼 빈둥거릴 생각에 즐겁다. 2020. 9. 22. 화 아들은 손자니까 그렇다 치고, 나는 아버지 엄마를 뵈러 명절 앞서 미리 다녀오기로 하였다. 주문했던 뉴케어 한 박스와 용돈을 준비하였다. 주문할 때 한 박스와 두 박스 사이에서 망설였는데, 두 박스 했다면 큰일 날 뻔했다. 한 박스 무게가 무려 6kg인 것을 물건 받고서야 알다니, 내가 이리 둔하다. 글치... 200ml×30=6000=6kg 아버지 집으로 바로 배송하려다.. 2020. 10. 28.
부스러記 17, 겨우 가을 2020. 7. 28 화요일 지난 토요일에 아들이 내려와서 어제 올라갔다. 설 연휴 이후 6개월 만이었다.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니 휴가라고 집에 와야 만날 친구도 없다. 오던 날 집 근처 장어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나 역시 경상도 피플이지만, 술 취한 겡상도 할배들에게 진저리가 났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술 취해 서로의 말이 안 들리니 질러대는 대화 아닌 고함. 힘겹게 극기 식사를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조용하고 깨끗한 장어집을 보았다. 우리 다음엔 저기 가자, 아들의 말에 함께 웃었다. 다음날 소고기를 참기름에 볶아 미역국 끓였다. 17일이 아들 생일이었는데, 지나간 생일은 챙겨주지 않는다지만 뭐 어떤가. 미역국 좋아하는 아이는 맛있게 먹었다. 아들은 이튿날 늦잠도 자고, 혼자 .. 2020. 9. 15.